첫 회사는 강남 빌딩숲에 있었다. 회사원들로 붐비는 거리, 사원증을 목에 걸고 또각또각 걸어가는 소속감이 어찌나 뿌듯했는지 인천에서 강남까지 왕복 네 시간인 출퇴근길도 견딜 만했다. 하지만 늘 발이 아팠다. 지하상가에서 헐값에 사 신던 구두는 금세 굽이 닳거나 떨어지곤 했다. 지방에서 상경한 나와 남동생은 인천에서 오래 자취를 했다. 매달 내야 할 학자금 대출금과 월세와 관리비와 생활비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주말에도 아르바이트를 하며 구두를 신었다. 불편한 신발을 신고 돌아오는 만원 전철에선 손잡이를 꽉 붙들고 버텨야 했다. 덜컹덜컹 흔들리며 생각했다. 버티는 청춘이란 이런 건가 하고.
어느 겨울, 야근을 마치고 달려가 겨우 막차를 올라탔는데 만석이었다. 내처 한 시간 반을 달리는 버스를 서서 가야 했다. 구두를 신은 발이 붓고 얼어서 너무너무 아팠다. 손잡이를 붙들고 버티다가 주저앉아 울고 싶을 지경이 되었을 때 동생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운동화 좀 가져다줄래.’
새벽 2시께 정류장에 도착했다. 나처럼 멀리서 자취하며 광역버스로 출퇴근하는 청년들이 우르르 내렸다. 그들 사이로 운동화를 손에 든 동생이 보였다. 절뚝거리며 의자에 앉아 신발을 갈아 신었다. 뒷굽이 떨어진 구두는 허투루 박아둔 못머리가 비죽 삐져나와 있었다. 동생이 불쑥 화를 냈다. “대체 이딴 걸 어떻게 신고 다니란 거야?” 나는 씩씩하려 애쓰며 대답했다. “내가 워낙 험하게 신어서 그래.” 나란히 걸어가는 길에 우린 아무 말이 없었다. 하얀 입김만 얼얼하게 퍼져나가던 새벽이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나서야 학자금 대출을 모두 상환할 수 있었다. 이제 나는 높은 구두는 신지 않는다.
훗날 결혼을 앞뒀을 때 동생이 찾아와 운동화를 내밀었다. “신혼여행으로 배낭여행 가는 사람이 어딨냐? 이 신발 신고 잘 다녀와.” 나는 튼튼한 운동화를 신고 20대엔 떠나보지 못했던 파리와 베네치아, 피렌체와 로마를 발바닥 뻐근하도록 자유로이 걸어보았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가끔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어본다. 큼직하고 말끔한 동생의 신발, 발등은 반듯하고 안창이 움푹해서 믿음직스럽다. 종종걸음이 몸에 밴 엄마의 신발, 뒤축은 구겨지고 밑창이 자주 닳아 안쓰럽다. 또 가끔은 다른 사람들의 신발을 바라본다.
전철에서, 터미널에서, 시장에서, 거리에서. 가만 바라보고 있자면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고 오래 걸어보기 전에는 판단하지 말라’던 경구가 가슴 아프게 찌른다. 저마다 어떤 생의 무게를 버티며 걷고 있구나. 누군가의 뒤꿈치에서 문득 그 사정을 알아채는 순간이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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