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면허에는 정년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공계) 박사는 대기업 연구원으로 일해도 50세가 넘으면 (퇴직해) 치킨을 튀긴다는 우스갯소리를 합니다.” 얼마 전 한 이공계 교수가 씁쓸한 표정으로 기자에게 해 준 말이다. 그는 “어차피 치킨을 튀길 거라면 석·박사 하지 말고 학부 졸업 직후 시작해 몇 년이라도 돈을 더 버는 게 낫지 않겠나”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정부가 첨단산업 인재를 육성하겠다고 공언했지만 올해도 이공계 인재는 의대로 쏠리고 있다. 이공계 인재를 육성하기 위한 영재고, 과학고 학생들조차 최상위권 이공계 학과보다 의대 진학을 우선적으로 고려한다. 동아일보가 16∼20일 보도한 ‘이공계 블랙홀 된 의대’ 시리즈를 통해 드러난 현실이다.
영재고를 졸업하고 서울의 의대에 재학 중인 A 씨(23)는 “고교 시절에 의대 원서를 쓰는 친구들은 KAIST에 지원하지 않는 암묵적인 룰이 있었다”고 했다. 의대에 가려는 최상위권 학생들이 KAIST마저 지원해 합격하면 다른 친구들의 자리를 빼앗는 셈이라는 이유에서다.
‘과학 영재’들이 의대를 선호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안정성이다. 의사 면허를 따면 소득, 사회적 지위가 일정 수준 이상 보장된다. 반면 ‘이공계 박사’ 학위는 이를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교수가 되는 건 ‘하늘의 별 따기’만큼 힘들고 기업 연구원으로 취직해도 고용이 불안정하다. 수도권의 과학고를 졸업한 뒤 의대에 진학한 B 씨(21)는 “이공계는 최고가 돼야 성공할 수 있는데 의사는 중간 정도만 해도 원하는 전공과에 들어가는 데 큰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성적 최상위권 학생들이 직업과 삶의 불안정성 때문에 이공계를 외면한다면 정부는 이에 대한 해결책을 내놔야 한다. 하지만 지난해 7월 발표한 반도체 관련 인재 양성 방안에는 대학 지원, 산학연 연계 같은 내용만 있을 뿐 인재들의 처우에 관한 내용은 없었다.
영재고를 거쳐 의대에 진학한 또 다른 학생은 “투입한 시간만큼 보상이 주어진다는 확신이 있었다면 연구를 계속 했을 것”이라고 했다. 과학계 일각에서는 “정부 출연 연구원부터 정년을 없애고 석·박사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을 확대해 경제적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는 요구가 나온다. ‘첨단 인재 양성’이란 구호만으로는 인재들을 끌어올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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