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지금, 여기 우크라이나에서 국제질서의 운명이 결정되고 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20일 대국민 방송연설은 비장하면서도 힘이 넘쳤다. 그는 그 국제질서가 ‘규범과 인간성, 예측 가능성’에 기반을 둬야 한다며 “필요한 것은 결의뿐”이라고 했다. 우크라이나를 깜짝 방문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을 만나 전투기 지원 등을 요청한 직후였다.
▷러시아가 침공 사흘 만에 끝날 것으로 믿었다던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곧 1년(24일)이 된다. 전 세계를 경악하게 한 이 전쟁은 국제 정세의 판을 완전히 흔들어놨다는 평가를 받는다. 미국과 유럽에 맞서 러시아와 중국이 밀착하는 ‘자유민주주의 대 권위주의’ 구도가 공고해졌다. 중-러의 밀착 속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는 아시아 안보 협의체인 쿼드(Quad), 오커스(AUKUS) 등과의 협력으로 태평양까지 연대 확장을 시도하고 있다. 블록화를 바탕으로 전선(戰線) 재편이 급속히 진행 중이다.
▷세계 2위의 군사대국인 중국의 대러시아 무기 지원은 향후 판도를 뒤흔들 변수다. 중국은 부인하지만 미국은 관련 움직임을 일부 포착했다는 게 외신의 보도다. 중국의 군사 지원이 현실화할 경우 진영 대결은 이념 전선을 넘어 유혈 충돌로 번질 수도 있다. 자칫 대규모 국제전으로 비화할지도 모를 일이다. 전쟁 장기화의 피로감 속에 러시아가 핵무기를 꺼내 들 가능성도 다시 제기됐다. 종신집권을 노리는 푸틴 대통령이 내년 3월 대선 승리를 위해 무리수를 쓸 수 있다는 우려다.
▷에너지난과 식량난 같은 지리경제학적 리스크도 현실화하고 있다. 제재로 막혀버린 기존 시장과 공급망의 대안을 찾느라 각국이 분주하다. 그렇다고 모든 국가가 진영 싸움에 동참하는 것은 아니다.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로 불리는 제3국가들 중에는 선뜻 편을 들지 않은 채 전세를 봐가며 합종연횡을 모색하는 곳이 적지 않다. 이념보다는 각국 이해관계에 따라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다는 의미다. 미국 중심의 일극체제가 끝나고 다극체제로 넘어가는 분기점에 이르렀다는 분석도 나온다.
▷양측 사망자 수 22만 명, 난민 등 인도적 지원 대상자 1800만 명, 물적 피해 1145억 달러(약 149조 원)…. 처참한 현실 앞에서도 전쟁은 쉽게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러시아의 ‘3월 대공습’을 앞두고 양측 모두 전방에 병력과 무기를 다시 집결시키고 있다. 이 파국적인 소모전의 끝이 어디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새 국제질서는 어떻게 정착될지, 그 비용은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를 비롯해 수많은 숙제가 던져질 것이다. 한국도 비켜 갈 수 없는 질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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