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정치인들이 출판기념회를 하면서 정치 자금을 모금하고 그러는 게 싫어요. 제 책을 실제 읽어본 분들과 대화하면서 정책적 제안 등에 대한 다음 단계를 논의하는 것이 더 가치 있다고 봅니다.”
다음 달 책 출간을 앞둔 국민의힘 이준석 전 대표는 최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이같이 말했다. 그는 별도로 출판기념회를 열지 않고, 대신 전국 각지를 돌며 독자와의 만남을 갖겠다고 밝혔다. 이 전 대표는 “내 책장에도 정치인들이 쓴 책이 엄청 많다. 대부분 큰 의미가 없는 자서전들”이라며 “출판기념회를 열어 거액의 후원금을 모으기 위해 의미 없는 책을 출간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라고도 꼬집었다.》
최근 더불어민주당 노웅래 의원이 검찰의 자택 압수수색 과정에서 나온 3억여 원의 현금 다발에 대해 “2020년 출판기념회에서 모은 후원금”이라고 해명하면서 출판기념회 후원금 논란이 여의도 정가에서 또다시 떠올랐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2014년 출판기념회에서의 금품 수수를 금지하고 개최 사전 신고를 의무화하는 정치관계법 개정 의견을 내놨다. 하지만 여야의 ‘합동 침묵’ 속에 개정안은 10년째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한 채다.
● ‘책값’이냐 ‘떡값’이냐
출판기념회는 원래 학계에서 제자들이 스승에게 연구 결과물을 헌정하는 행사에서 비롯됐다. 하지만 정치권에서는 선거에 출마하려는 정치인이 출정을 알리는 동시에 ‘책값’ 명목으로 정치 후원금을 모집하기 위한 행사로 통용된 지 오래다. 출판기념회로 거둬들이는 수익금은 현행법상 모금 한도나 내역 공개 의무가 없고 과세 대상도 아니다. ‘꼬리표’가 붙지 않는 돈이기 때문에 흐름을 추적하기도 어렵다.
의원들의 출판기념회 소식에 가장 바빠지는 건 상임위원회별 유관기관 및 기업의 대관(對官)업무 담당자들이다. 공공기관 대관 담당자는 “평소 알고 지내던 보좌진이 넌지시 의원의 출판기념회 소식을 전하거나 초대장을 보내온다”며 “소관 상임위 의원이라면 반드시 챙겨야 하는 주요 행사”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의원님들의 책값’은 얼마일까. 서점에서 팔리는 책의 ‘정가’와는 차이가 크다는 게 대관 담당자들의 공통된 전언이다.
출판기념회 현장에서 봉투에 5만 원권 여러 장을 담아 넣는 것은 기본. 국회 보좌진 출신인 기업 대관 담당자는 “의원 출판기념회가 열리면 현금으로 들어온 돈을 일일이 세어 정산하느라 아무도 퇴근을 못 했다”며 “아무리 못해도 한 번에 최소 7000만 원은 들어온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의원 지역구에서 출판기념회가 열릴 경우 지역 유지 등 ‘큰손’들의 지갑이 열리기 때문에 단위부터 달라진다고 한다.
대기업의 경우 주요 ‘마크’ 대상 의원에 대해 책값으로 수백만 원에서 천만 원대까지 ‘투자’하기도 한다.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의원실 대신 출판사를 통해 별도로 카드 결제를 하고 회사에는 ‘연구비’ 또는 ‘자료비’ 명목으로 비용 처리를 하는 식이다. 한 협회 관계자는 “책 수십 권의 값을 치른 뒤 실제로는 한두 권씩만 챙겨 온다”며 “나머지 책값은 사실상 의원이 다 가져가는 것”이라고 했다.
한 보좌진은 “심지어 출판사에 떼어줘야 하는 수수료가 아까워서 1인 출판사를 급하게 차리는 의원실도 있다”고 귀띔했다. 노영민 전 대통령비서실장은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던 2015년 국회 의원회관 사무실에 휴대용 카드단말기까지 두고 시집을 팔다가 ‘갑질’ 논란 끝에 이듬해 총선에 불출마하기도 했다.
일부 의원은 대필 작가에게 떼어줘야 하는 3000만∼5000만 원의 비용을 아끼기 위해 보좌진에게 책을 쓰게 하기도 한다. 한 보좌진은 “한 명이 도맡기도 하고 보좌진끼리 40∼50페이지씩 분량을 나눠서 쓰기도 한다”고 했다.
● 10년째 안 되는 법 개정
정치권에서는 출판기념회가 음성적인 정치 후원금의 통로로 활용된다는 지적이 그동안 꾸준히 제기돼 왔다. 노웅래 의원 사례 이전에도 새누리당 박상은 전 의원은 2014년 ‘해운업계 비리 의혹’ 연루로 수사를 받던 중 차 안에 있던 가방에 든 현금 3000만 원을 도난당했다고 신고한 뒤 현금 출처에 대해 “일부는 지난해 말 출판기념회 때 들어온 돈”이라고 해명해 논란이 됐다. 같은 해 새정치민주연합 신학용 전 의원도 한국유치원총연합회로부터 법안 발의 대가로 출판기념회 축하금 수천만 원을 받은 것이 드러났다.
출판기념회 후원금이 매번 논란이 되자 선관위는 2014년 국회의원이 출판기념회를 열려면 관할 선관위에 신고하도록 하고 정가 또는 통상적인 가격 이상으로 책을 판매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안 개정 의견을 내놨다. 선거일 90일 전부터 후보자와 관련된 출판기념회 개최만을 금지하도록 한 현행법보다 규제를 강화하자는 것.
이에 대해 정치권도 자성의 목소리와 함께 법 개정 발의를 약속했지만 역시나 ‘공약(空約)’에 그쳤다. 2014년 당시 여당이었던 새누리당의 김무성 전 대표는 “선출직 의원이나 로비 대상에 있는 고위공직자는 출판기념회를 하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같은 해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125명은 책을 정가로 팔아야 하며, 수입과 지출을 선관위에 신고한다는 내용을 담은 ‘국회의원윤리실천특별법안’을 공동 발의했지만 결국 상임위를 통과하지 못한 채 폐기됐다.
출판기념회 관련 법 개정 발의는 2018년이 마지막으로, 당시에도 소관 상임위인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폐기됐다. 21대 국회에서는 관련 논의조차 없었다.
● 의원들 “정치 후원금 현실화해야”
여야 의원들은 한목소리로 “출판기념회는 필요하지만 이를 통해 정치 후원금을 모금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입을 모았다.
국민의힘 한 의원은 “의원이라고 해서 출판을 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으니 출판기념회 자체를 막는 것은 부적절하다”며 “다만 돈을 수금하기 위한 방법으로 쓰여선 안 되고, 책이 정가대로 팔리도록 실효성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민주당 안규백 의원도 “의정 기록을 남길 수 있는 건전한 출판기념회는 권장하되 음성적인 수금이 이뤄지지 않도록 차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만 여야 의원들은 정치인들이 후원금을 음성적으로 모을 수밖에 없는 현실적인 부분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치 후원금 모금 한도액은 2004년 이후 평년 1억5000만 원, 선거가 있는 해는 3억 원으로 정해진 뒤 20년간 오르지 않고 있다.
한 국회 보좌진은 “물가 변동률을 따지면 법정 한도가 정해진 후원금만으론 의정활동을 치르기 빠듯한 의원이 많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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