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M엔터테인먼트 인수를 둘러싼 분쟁이 점입가경이다. 하이브와 카카오, 누가 SM을 인수할지는 이달 31일 주주총회에서 결정될 예정이다. 서로 간의 폭로와 여론전에서 눈에 띄는 대목이 하나 있었다. 박지원 하이브 최고경영자(CEO)가 사내 설명회에서 SM 인수를 설명하면서 말한 “SM의 레거시(유산)를 존경한다”는 발언이었다.
레거시. 사전적인 의미 그대로 유산 혹은 전통을 이야기할 때 자주 쓰는 말이다. 케이팝은 레거시와는 가장 거리가 먼 음악이었다. 빠르게 바뀌는 유행, 짧은 기간 사라져간 중소 기획사들, 7년이라는 표준계약 기간 이후 진로를 고민해야 하는 태생적인 한계의 아이돌 그룹 사례처럼 케이팝이 전통이나 유산이란 말을 쓰기엔 어색한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케이팝 산업이 시작한 지도 어느새 27년이란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음악계에서 보는 케이팝의 출발점은 1996년, H.O.T.의 데뷔다. 현재와 같은 육성과 관리 체계를 도입한 케이팝의 출발점으로서 H.O.T.는 상징적인 그룹이었다. 거의 한 세대에 걸쳐 케이팝이란 음악이 한국에서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그 시작에는 H.O.T.를 키운 SM이 있었다. 이수만 전 총괄 프로듀서가 자신의 영문 이니셜을 따 만든 회사다.
그 뒤로 SM은 케이팝 업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을 가장 먼저 겪으며 영욕의 세월을 보냈다. 노예계약 이슈와 함께 표준계약서를 쓰게 한 것도 SM에서 비롯됐고, ‘한류’란 말과 함께 소속 가수들을 한국 밖의 시장에 처음 진출시킨 것도 SM이었다. 이제는 친숙해진 ‘송 캠프’라는 제작 시스템, ‘세계관’이라는 억지스러운 용어를 아이돌 그룹에 붙인 것도 SM이 시작이었다.
그 영욕의 시간을 보낸 SM에 레거시란 표현이 붙는 건 과해 보이지 않는다. 지난해 말 SM 소속 그룹 ‘NCT 드림’은 H.O.T.가 1996년 발표한 ‘Candy’를 다시 불렀다. 사실상 SM과 H.O.T.에게 처음 대중적인 성과를 안겨준 노래다. H.O.T.는 ‘전사의 후예’로 데뷔했지만 당시 팬을 제외한 일반 대중에겐 ‘불호’에 가까운 이미지였다. 하지만 후속곡 ‘Candy’로 대중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발표된 지 26년이 지난 노래를 같은 소속사의 후배 그룹이 재해석하면서 26년 전과 흡사하게 콘셉트를 가져간 건 SM의 유산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얼마 전 이성수·탁영준 SM 공동대표는 “SM은 음악 회사다. 앞으로 어떠한 상황이 오더라도 ‘음악’이라는 본질을 잃지 않겠다”는 발언을 했다. 실제로 SM은 비판도 많았지만 좋은 노래도 많이 만들어냈다. H.O.T.의 ‘Candy’나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는 세계관 따위 없이도 레거시란 말에 어울리는 고전이 됐다. 샤이니의 청량함이 주는 매력이 있었고, SMP(SM Music Performance)라는 고유의 스타일도 있었다.
음악으로 쌓아 올린 역사와 유산이 음악 외적인 이유로 훼손되고 있다. 이번 SM 사태를 보는 마음이 편치 않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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