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언어로[이은화의 미술시간]〈256〉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3월 2일 03시 00분


노란 꽃이 핀 들판에 두 청춘이 함께 있다. 벌거벗은 소년은 한쪽 다리와 팔을 굽힌 자세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고, 푸른 드레스를 입은 소녀는 무릎을 꿇은 채 소년을 향해 입으로 바람을 불어대고 있다. 아름다우면서도 기이해 보이는 장면이다. 대체 이들은 누구고 무엇 때문에 이러고 있는 걸까?

페르디난트 호들러는 스위스를 대표하는 상징주의 화가다. 그는 대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외적인 모습 뒤에 숨겨진 상징을 표현하려고 했다. 1890년대 이후 사랑, 죽음, 희망, 믿음과 같은 인간의 근본적인 주제에 몰두했는데, 이 그림(‘봄’·1901년·사진)은 사랑을 다루고 있다. 들판에 핀 노란 꽃들과 봄이라는 제목은 청춘 남녀의 사랑이 점점 커지는 것을 상징한다. 하지만 두 사람의 시선과 자세는 완전 다르게 읽힌다. 같은 장소에 함께 있을 뿐 전혀 의사소통을 하지 못하고 있다. 소녀는 봄의 온기를 전하려는 건지, 온 힘을 다해 소년 쪽으로 바람을 불어댄다. 아주 적극적이다. 반면, 소년은 무심한 건지 부끄러운 건지,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둘 다 얼굴이 빨개진 걸로 봐선 좋아하는 사이인 것 같은데 말이다.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이 서툰 청춘의 모습 같기도 하다.

두 인물의 모델은 호들러의 조카와 아들 헥토르다. 당시 아들은 14세였다. 이 그림을 그렸을 때, 호들러는 헥토르의 엄마와 헤어진 후 결혼한 부인과도 이혼한 상태였다. 사랑에 서툰 건 그림 속 모델이 아니라 오히려 화가 자신이었다.

의사소통을 못 하는 그림 속 자신이 싫었던 걸까? 헥토르는 2년 후 에스페란토를 배우기 시작하더니 21세가 되던 1908년 세계에스페란토협회를 설립했다. ‘희망하는 사람’이란 뜻을 가진 에스페란토는 1887년 폴란드 의사 자멘호프가 창안한 국제적 의사소통을 위한 인공어다. 아버지와 달리 아들은 사랑하는 사람뿐 아니라 세계인들과 소통하는 희망을 가졌던 듯하다. 봄처럼 따뜻한 언어로 말이다.

#봄의 언어#이은화의 미술시간#페르디난트 호들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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