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 학생이 면담을 신청했다. 무슨 상담을 할지 짐작이 됐다. 요즘 학부생 가운데 자퇴하고 다른 학교로 편입하거나 다시 대학시험을 치르는 학생이 많다. 어떤 학과는 자퇴하는 신입생 수가 많아 학교 당국이 놀랄 정도다. 이런 움직임은 일시적인 현상일까, 아니면 새로운 세대의 흐름일까?
면담시간이 되자 학생이 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는 말 없이 지도교수란에 사인을 해주면 끝이었다. “물리가 어려웠니?” 학생을 보자 이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열망은 있었는데 어렵기도 하고 저하고는 맞지 않는 것 같아요. 좀 더 실용적인 학문을 하고 싶어서 편입을 했어요.” 마치 잘못을 한 사람처럼 이야기해서 “잘 생각했네”라는 말과 함께 내 생각을 이야기해줬다.
자신의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을 한다는 것은 고통이다. 적성에 맞고 열망을 품고 있어도 일이 어려워지고 뒤틀리면 나락으로 떨어지듯 힘들어진다. 나 역시 학생 때 ‘물리를 포기할까’ 하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 내 능력이 부족한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어찌어찌 자학의 터널을 지나면 신기하게도 열심히 물리 문제를 풀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유학 생활을 할 때는 정말 진지하게 ‘다른 길을 가야 할까’ 하고 고민했다. 풀리지 않는 문제를 누군가가 먼저 해결해내며 치고 나갈 때는 절망감에 빠졌다. 이런 상황이 되면 자신감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아이들은 커가는데 어떻게 가족을 부양해야 할까, 하는 걱정에 더 바닥없는 곳으로 떨어졌다.
그때는 대부도에서 포도밭을 가꿔 와인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 와인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냉철하고 치열한 경쟁의 세계를 떠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가끔 와인 만드는 책을 찾아 읽기도 했고 프랑스에서 열리는 학회가 끝나면 와이너리를 진지하게 둘러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 고비는 와인의 알코올처럼 사라졌다. 아마도 당장 눈앞에 놓여 있는 물리 문제를 풀어야 하는 숙명 때문이 아니었을까?
인생은 선택이다. 50 대 50이라는 확률적 선택. 가느냐, 가지 않느냐. 양자역학도 마찬가지다. 양자의 미래를 확률적으로 바라본다. 우리는 수학적으로 완벽한 슈뢰딩거의 파동함수를 이용해 눈에 보이지 않는 양자의 운동을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 하지만 예측만 할 수 있을 뿐 그 결과는 아무도 모른다. 뚜껑을 열어 보기 전에는.
거시 세계를 사는 우리도 매 순간 선택을 한다. 가지 않은 길에 미련을 가진다. 우연히 일어난 일임에도 인과적으로 생각한다. 이유를 찾고 감정적으로 다가간다. 마치 미시 세계의 양자처럼, 우리는 한 치 앞도 모르는 미래, 뚜껑을 열어봐야만 알 수 있는 현재를 살고 있다. 가지 않는 미래는 알 수 없다.
표정이 한층 밝아진 학생을 연구실 문 앞까지 배웅하며 악수를 청했다. 이 시간이 지나면 학생은 자신이 선택한 길을 걸어갈 것이다. 나 역시 학생과 마찬가지로 순간순간 선택을 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문을 닫고 들어오는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숨을 쉬고 현재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지금까지 우리는 좋은 결정을 해온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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