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도 레벨이 있다고?[이재국의 우당탕탕]〈77〉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3월 3일 03시 00분


이재국 방송작가 겸 콘텐츠 기획자
이재국 방송작가 겸 콘텐츠 기획자
나는 비교적 행복하면 행복한 거라고 믿고 살고 있다. 회사도 집도 남산 근처라서 틈틈이 하루 만 보씩 남산 공원에서 산책하고 점심은 동네 백반집에서 먹고 일주일에 2, 3일은 친구나 동료를 만나 삼겹살에 소주도 한잔하면서 살고 있다.

조금 더 맛있는 안주를 먹기 위해 때론 일찍 가서 줄도 서고, 새로운 맛집을 찾아내면 기분이 좋아서 주변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즐거움도 누린다. 주말에는 동호회 사람들과 테니스를 치고 가끔은 캠핑도 다닌다. 그렇다고 놀기만 하는 건 아니다. 평일에도 일하고, 때론 야근도 하고 필요하면 주말에도 일한다. 일은 잘될 때도 있고 잘 안될 때도 있다. 열심히 준비한 일이 잘 안될 때도 있고 별 기대 안 한 일이 잘될 때도 있다.

항상 행복하면 좋겠지만 그런 인생은 없다. 그래서 난 대체로 행복하면 행복한 인생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얼마 전 친한 친구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너 즐겁게 사는 거 보기 좋아. 행복해 보이고. 근데 행복에도 레벨이 있더라고. 난 네가 행복 레벨을 좀 올렸으면 좋겠어.” 행복에도 레벨이 있다고? 처음 듣는 얘기였고, 한 번도 고민해 본 적 없는 말이었다. “네가 말하는 행복의 레벨이 뭔데?” 친구는 그날 강남에 있는 비싸고 맛있는 소고기집으로 나를 데려갔고, 며칠 후에는 비싼 오마카세로 나를 초대했다. “값싸고 가성비 좋은 노포 맛집도 좋지만 가끔은 분위기 있는 맛집도 가보면 좋을 것 같아서. 만 원짜리 와인도 괜찮지만 10만 원짜리 와인은 훨씬 괜찮거든.”

하, 겨우 이게 행복의 레벨이라니. 친구에게 조금 실망했다. 아무리 맛있는 오마카세도 어쩌다 먹으면 맛있지만 매일 먹으면 질려서 못 먹는다. 비싼 부위의 소고기도 마찬가지고. 그 친구는 행복을 특별한 곳, 특별한 것에서 찾았지만 난 사실 일상에서 행복을 찾는 편이라 행복에도 레벨이 있다는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아니 동의하기 싫었다. 해외여행을 가는 자체로 설레고 기분이 좋았지, 꼭 비즈니스석을 타거나 퍼스트클래스를 타야 즐거운 건 아니었고, 친한 사람들과 맛있는 삼겹살을 먹는 것 자체가 행복이었지 꼭 비싼 오마카세를 먹는다고 더 행복한 건 아니었으니까. 아는 형님 중에 굉장히 성공한 분이 계신데 그분은 술자리에 꼭 여러 종류의 술을 준비하신다. 소주, 맥주, 양주, 와인 등등. 그리고 안주가 나올 때마다 술을 골라서 드신다. “수육 나왔으니까 소주 한잔하자!” “이번에는 스테이크 나왔으니까 레드와인 한잔하자!” “치즈 나왔으니까 위스키 한잔하자.” 그 모습이 좋아보였고 부러웠지만 난 그렇게 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주일에 하루는 소주에 어울리는 안주로 저녁을 먹고, 하루는 와인에 어울리는 안주로 저녁 약속을 정하고, 하루는 막걸리에 어울리는 안주로 약속을 정한다. 레벨이 좀 낮더라도 나에겐 이 방식이 맞고, 이렇게 즐길 때 난 충분히 행복하다. 레벨이라는 건 결국 등급을 나누는 것이고 등급을 나누다 보면 결국 남과 비교하며 살아야 하고 비교하다 보면 언젠가는 초라해지기 마련이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라는 말처럼 “행복도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는 말이 맞는 것 같다.

#행복#레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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