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1983년생 지인 P는 위와 같은 대화방 초대 알림에 흠칫 놀랐다. 오랜만에 함께 스키장에 다녀온 친구들이 새로 만들어 초대한 ‘단톡방’이었다. 특히나 대화방 제목이 P의 마음 한편을 성에 끼듯 뽀얗게 만들었다. 대화방 제목은, ‘하늘은 우릴 향해 열려 있어’.
P는 미소를 머금은 채 바쁘게 엄지를 움직였고 첫 대화를 이렇게 시작했다.
‘그리고 내 곁에는 니가 있어 ♡’
#1. 20세기를 산 사람이면 반사적으로 멜로디까지 함께 튀어나오는 저 문장. 이현도와 고 김성재(1972∼1995)가 결성한 듀오 ‘듀스’의 1994년 발표곡 ‘여름 안에서’ 가사다. P는 추억을 되살려준 단톡방 친구들에게 화답하듯, 스노보드 타는 영상에 서태지와 아이들의 1995년 곡 ‘Free Style’ 음악을 붙여 공유했다. ‘Free Style’은 스노보드 장면이 가득한 뮤직비디오로 유명하다.
#2. P의 마음을 몽글몽글하게 만든 ‘여름 안에서’는 여러 차례 리메이크된 곡이다. 2003년 가수 서연이 재해석한 버전도 원곡 못잖은 인기를 누렸다. 리메이크 릴레이는 계속됐는데 2020년 그룹 ‘싹쓰리’를 거쳐 지난해 하반기만 해도 세 팀의 아이돌 그룹이 ‘여름 안에서’ 리메이크를 발표했다.
#3. P 씨와 스키장 친구들은 이번 여행에서 두 가지 공통점을 새삼 발견했다. 첫째, 어린 시절을 보낸 1990년대에 여전히 강한 향수를 갖고 있다는 것. 둘째, 딸뻘에 가까운 신인 그룹 ‘뉴진스’에 푹 빠져 있다는 것. P 씨의 사례에서 요즘 문화계를 꿰뚫는 ‘9000’ 바람을 엿본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사이의 대중문화에 대한 향수 말이다. ‘콘서트 7080’이 대변하는 ‘7080’(1970, 80년대) 향수, 음악 주점 ‘밤과 음악 사이’로 대표되는 ‘8090’(1980, 90년대) 향수가 그 바통을 이제 ‘9000’에 넘겨주는 장면이 보인다.
#4. 1990년대 ‘X세대’와 2000년대 ‘Y2K’의 코드를 패션과 영상에 대놓고 녹여 넣는 뉴진스는 그 대표주자다. ‘20세기 소년소녀’라면 알아볼 것이다. 그들의 ‘Ditto’(1월 2일 발매) 뮤직비디오에 널린 수많은 추억 코드들을. 서랍에서 VHS 테이프를 찾아 브라운관 TV 아래 놓인 비디오 플레이어에 넣는 도입부부터 숨이 가빠온다. 접이식 캠코더, 세로형 투 도어(two-door) 냉장고, 철제 캐비닛, ‘피크닉 사과맛’ 음료…. 소품뿐 아니다. 수돗가 장면은 1998년 언저리를 소환한다. 그해 개봉한 귀네스 팰트로 주연의 영화 ‘위대한 유산’, 또는 그해를 시대적 배경으로 삼은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의 유명한 수돗가 장면 말이다. 학교를 배경으로 여학생들 간의 우정을 은밀한 분위기로 담아낸 데선 1998년 개봉한 ‘여고괴담’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5. 이런 회귀적 흐름은 몇 년 새 부쩍 가시화됐다. 2021년 에스파는 1998년 S.E.S.의 곡 ‘Dreams Come True’를, 지난해 NCT DREAM은 1996년 H.O.T.의 노래 ‘Candy’를 재해석했다. 가요계 이야기만이 아니다. 1월 미국 CNN 보도에 따르면, 1990년대에 생산된 자동차의 가치가 최근 3년간 무려 78%나 상승했다고 한다. 올해 초 넷플릭스는 1995년 여름을 배경으로 한 청춘 시트콤 ‘90년대 쇼(That 90‘s Show)’를 내놨다. 1998년부터 2006년까지 방영된 인기 시트콤 ‘70년대 쇼(That 70’s Show)’의 후속작이다.
현재 빌보드 싱글차트 상위권에 12주째 자리한 프로듀서 ‘메트로 부민’의 곡 ‘Creepin‘’(현재 4위)은 마리오 와이넌스의 2004년 히트곡 ‘I Don’t Wanna Know’를 뼈대로 만들었다.
#6. 1990년대와 2000년대는 대중문화 폭발기였다. 무선호출기, 휴대전화, PC통신, 싸이월드가 등장하며 취향 공동체와 팬덤이 개화했다. 마음 맞는 이들끼리 텍스트를 넘어 음성과 이미지까지 실시간으로 공유하게 된 덕이다. 요즘 젊은이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네트워크만 고도화됐을 뿐. 뉴진스는 팬 소통 앱 ‘포닝’에 PC통신 감성을 담았다. 그 시절을 살지 않은 10, 20대에게도 ‘9000 감성’은 특별하다. 조금 촌스러워 만만하기까지 한, ‘어딘지 낯익은 신세계’다. 그래서일까. ‘더 퍼스트 슬램덩크’ 열풍도 시간이 흐르며 그 연령대가 내려가고 있다.
#7. 그러고 보니 사반세기가 훌쩍 갔다. 추억의 편린은 시간의 동그란 운동장을 한 바퀴 돌았고, 오래전 그날 학교 매점에 떨어뜨렸던 배지처럼 문득 손안으로 다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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