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 중심 경제’로 전환한다더니… [오늘과 내일/박용]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3월 7일 21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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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구조부터 금리까지 정부 개입
정부 우위 ‘기울어진 운동장’ 여전

박용 부국장
박용 부국장
금융회사 본부장급 간부 A 씨는 기획재정부(재정경제부) 출신 퇴직 관료들(김낙회 변양호 이석준 임종룡 최상목)이 2년 전 내놓은 책 ‘경제정책 어젠다 2022’를 찾아 읽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금융회사나 KT 등 소유분산 기업의 지배구조 문제를 언급한 뒤 주위에서 일독을 권했다.

저자 중 최상목 전 기재부 제1차관은 윤석열 정부에서 대통령실 경제수석비서관에 임명됐다. 이석준 전 기재부 제2차관은 NH농협금융지주 회장에 취임했다. 임종룡 전 금융위원장은 얼마 전 우리금융 회장에 내정됐으니 무시하기 어려운 책이다. 내용 중엔 한국 경제의 ‘3대 과제’ 중 하나로 ‘공정한 경쟁 환경 조성―기업 지배구조 혁신을 위한 제도 개편 방안’까지 들어 있다. A 씨가 이 책을 집어 든 건 ‘관치 경제’에서 터득한 민간의 ‘생존 본능’이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사석에서 금융회사 최고경영자(CEO) 연임 개입 논란과 관련해 “우린 비토(거부권)는 해도 추천은 하지 않는다”며 선을 그었다. 하지만 퇴짜만 놓아도 임원 인사, 신규 채용과 투자 등이 ‘올스톱’되고 불확실성이 커지는 게 기업 경영이다. ‘윤심’이니 ‘명심’이니 따지는 후진적 정당 지배구조로 지탄을 받고 있는 정치인들이 기업 지배구조엔 ‘그들만의 리그’니 ‘이권 카르텔’이니 입바른 말을 하면 앞에서 굽신거려도 뒤돌아서 비웃는 게 저잣거리 민심이다.

퇴직 관료나 정치인이 기업이나 금융사 CEO로 가더라도 실력과 리더십이 있다면 출신을 따지는 건 촌스럽다. 하지만 중력이 작용하는 것처럼 관에서 민으로만 흐르는 일방통행식 인사라면 불공정하다. 윤석열 대통령이 강조하는 ‘글로벌 스탠더드’와도 거리가 있다. 벤처기업인 출신 이영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을 빼면 대부분의 장관이 정치인, 관료, 학자로 구성된 ‘정·관·학’ 출신이다. 한국의 엄격한 공직 기준을 통과할 정도로 자기관리가 잘돼 있는 기업인이 별로 없다손 쳐도 전문성과 도덕성을 겸비한 민간 인재를 발탁할 시스템이나 의지가 있다면 못 할 일도 아니다.

미국은 민간기업이나 금융회사 CEO로 경험을 쌓고 재무장관이나 상무장관이 되는 일이 드물지 않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에서 재무장관으로 일한 스티브 므누신은 골드만삭스, 상무장관으로 일한 윌버 로스는 로스차일드은행 출신 기업인이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일한 행크 폴슨, 민주당인 빌 클린턴 대통령이 지명한 로버트 루빈까지 골드만삭스 출신 재무장관만 3명이다. 오히려 너무 쏠려서 탈이다. 조 바이든 행정부도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최초 여성 의장을 지낸 재닛 옐런을 재무장관에 발탁했다. 지나 러몬도 상무장관은 로스쿨을 졸업하고 로드아일랜드 최초 벤처캐피털 회사의 공동 창업자로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윤 대통령은 1년 전 대선 다음 날인 3월 10일 국회 대국민 인사에서 “정부 주도가 아닌 민간 중심의 경제로 전환하겠다”고 했지만, 요즘 “그 약속을 믿을 수 있나”라며 의심하는 이들이 꽤 있다. 정부가 해답을 갖고 있지 않은 기업 지배구조나 금리 등 시장 가격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입김을 세게 불어넣고 있기 때문이다.

기업이 정부 눈치를 살피고 모든 일이 관을 통해야만 해결되는 ‘만사관통’ 사회에선 관은 상전이고 민간은 늘 뒷전이다. 윤 대통령이 약속한 민간이 끌고 정부가 미는 ‘민간 중심 경제’도 오지 않는다. 기업인이 정부보다 시장을 먼저 바라보고, 실력으로 민관 전문가가 물 흐르듯 교류할 수 있어야 ‘관치’니 ‘낙하산 인사’니 하는 말이 사라진다. 정부 우위의 ‘기울어진 운동장’도 비로소 평평해질 것이다.

#민간 중심 경제#정부 개입#기울어진 운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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