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오후 일본 도쿄 진보초(神保町). 도쿄의 관문인 도쿄역에서 불과 1.7km 남짓 떨어진 도심이면서도 저편의 화려한 고층빌딩 숲과는 분위기가 완연히 다른 푸근함과 넉넉함이 느껴지는 동네다. 헌책방 180여 곳이 몰려 있는 세계 최대 고(古)서점 거리로 유명하지만 작은 라이브하우스나 재즈클럽도 곳곳에 있고, 스포츠용품 거리이면서도 카레 가게가 밀집한 ‘카레 메카’로도 알려진,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매력 가득한 곳이다.》
지난해부터 여기에 또 다른 매력이 가미됐다. 진보초가 이른바 공유형 서점 열풍의 중심지로 떠오른 것이다. 공유형 서점이란 기존 서점 안에 있는 책장 한 칸을 빌려 나만의 서점을 운영하는 것을 말한다. 매달 일정 정도의 돈을 내면 바로 ‘미니 책방’ 주인이 된다. 짭짤한 수익을 기대하긴 어렵지만 일본, 어쩌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책의 거리에서 책을 보는 것이 아니라 파는 경험을 할 수 있다. 공유형 서점 붐이 부는 진보초 뒷골목을 걸었다.
책장마다 개성 한가득
진보초역은 도쿄 지하철 3개 노선이 교차한다. 여기서 내려 좁은 골목길을 5분쯤 걸어가니 짙은 파란색 문틀의 큼직한 유리문이 있는 가게가 나온다. 프랑스 파리 샹젤리제 상점가를 연상시킨다. 문 앞에 놓인 스탠드형 간판에는 책 읽는 고양이 캐릭터와 함께 ‘네코노혼다나(猫の本棚·고양이 서가)’라고 쓰여 있다. 공유형 서점의 원조 격인 이곳은 어느새 진보초 거리 명물로 떠올랐다.
전형적인 동네 점포만 한 네코노혼다나에는 가로 30cm, 세로 35cm, 깊이 30cm 책장 170개가 세 벽을 둘러싸고 있다. 가입비 1만1000엔(약 10만5000원)에 매달 이용료 4400엔(약 4만2000원)을 내면 책장 하나를 빌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내 서점을 꾸밀 수 있다. 대여 기간은 3개월 이상이다. 서점 한가운데 책을 전시하는 팝업 테이블과 잠시 앉아서 독서할 수 있는 간이 의자를 갖췄다. 팝업 테이블은 책장 주인이 서점과 상담해서 무료로 쓸 수 있다.
책장마다 주인의 개성을 뽐내는 듯 다양한 장르의 책들이 들어 있다. 만화책으로 가득한 책장, 절판된 영화 서적으로 채운 책장, 영국 소설가 제인 오스틴 책만 있는 책장…. 주인의 성향과 관심사, 취미 등을 단박에 알 수 있다. 책장 대부분은 책뿐 아니라 주인이 손님에게 전하는 메모나 액자, 인형 등으로 꾸며져 있다. 베스트셀러는 드물다. 철저히 주인 마음대로다. 다른 사람들이 읽게 하고 싶은 책들이다. 책장에 붙은 주인들 이름은 평범한 사람에서부터 영화감독, 배우, 소설가 같은 유명인도 있다.
‘대면의 중요성 깨닫는 공간’
“한국에서 오신 기자라면 여기 잠깐 보시겠어요?”
점주 미즈노 구미(水野久美) 씨가 가리킨 책장에는 ‘그림자놀이’ ‘당근 유치원’ ‘마음아 안녕’ 같은 유아용 한글 그림책이 20권 넘게 꽂혀 있다. 한국어 공부에 푹 빠진 일본인 대학교수가 아이와 함께 읽은 그림책을 내놓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 위 칸에는 일본에서도 베스트셀러에 오른 소설 ‘82년생 김지영’ 일본어 번역본과 ‘황병기 가야금 작품집’ ‘한국 영화의 정신’ ‘유라시아풍의 신라’ 같은 책이 담긴 책장도 눈에 띄었다. 익명의 주인은 ‘여러 모습의 한국을 즐길 수 있는 책들입니다’라는 메모를 올려놨다.
네코노혼다나는 공간을 실내디자인 및 실내장식으로 꾸미는 공간플래너 출신 미즈노 씨와 일본 유명 영화감독 히구치 나오후미(樋口尚文) 씨가 함께 만들었다. 색다른 분위기를 내기 위해 일부러 160년 전 사찰 난간과 100년 전 샹들리에를 어렵게 구해 실내를 꾸며놨다. 히구치 감독의 영향으로 영화 관련 책장이 많다. 검열과 터부에 저항하는 문제작 ‘감각의 제국’(1976년) 같은 작품으로 일본 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오시마 나기사(大島渚·1932∼2013) 감독 장서 코너를 마련해 주목받기도 했다.
미즈노 씨는 “코로나19 이후 서로 만날 수 있는 공간의 중요성을 새삼 깨달았다”며 “책의 거리로 유명한 진보초에서 한두 명 정도 조용히 쉬러 올 수 있는 안식처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재밌는 분들이 책장 주인으로 와 주실 거라고 기대했다”고 말했다.
대면 공간이라면 커피숍도 괜찮지 않았겠느냐고 물었다.
“여기가 평범한 카페였으면 한국 신문기자가 와 주셨겠어요. 하하하. 특별한 공간으로 꾸몄기 때문에 많은 분의 사랑을 받는 것 같아요.”
책장은 대부분 주인을 만나 지금 신청하면 한동안 대기해야 할 정도로 인기다.
서점 줄지만 공유형 모델 늘어
‘독서 왕국’ 일본도 인터넷 스마트폰에 밀려 책 읽는 인구가 줄어들고 온라인 쇼핑이 늘면서 서점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1999년 전국에 2만2000개가 넘었던 서점은 지난해 8600여 곳으로 60%가량 줄었다. 동네 서점이 사실상 전멸한 한국에 비한다면 다소 사정이 낫지만 일본에서도 작은 서점은 갈수록 사라지는 분위기다. 진보초 역시 10년 전에 비해 고서점이 30%가량 줄어들 만큼 타격을 피하지 못했다.
깊어지는 서점 소멸 위기 속에서도 공유형 서점은 지난해부터 일본 전국에서 본격적으로 퍼지고 있다. 도쿄에만 10곳 넘게 생겼다. 공유형 서점 정보를 제공하는 홈페이지가 등장했고 주요 신문과 TV에서도 연일 소개되고 있다.
공유형 서점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서점이나 도서관에 가는 것을 넘어서는 새로운 공유 경험을 제공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다른 사람에게 팔아서 공유할 뿐만 아니라 그런 밀접한 관계와 소통이 형성되는 공간을 공유하는 체험이다. 네코노혼다나는 “비즈니스로 생각하는 분들께는 추천하지 않는다”며 “나만의 작은 서점을 어떻게 이름 붙이고 어떻게 꾸밀지, ‘서점 주인’ 체험을 즐길 수 있는 곳으로 활용해 달라”고 밝혔다.
돈벌이를 주목적으로 하지 않다 보니 뒷골목에 자그마하게 숨어 있지만 이런 은밀함이 오히려 매력으로 떠오르고 있다. 인스타그램을 비롯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중심으로 입소문을 타며 공유형 서점 팬이 늘어나고 있다. SNS에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서점에 다녀왔다” “이런 책을 소개하는 책장 주인이 궁금하다” 같은 게시물이 공유되고 있다.
일부 공유형 서점에서는 작은 책방 주인들이 모이는 교류 모임도 주최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책을 많이 팔 수 있을지도 논의하지만 주인 각자의 콘셉트와 지향점을 공유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책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책 마니아 모임’에 가깝다.
진보초 공유형 서점에서 만난 손님은 “책장을 꾸밀 수 있을 만큼 자기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이 매력적으로 느껴진다”고 말했다. 책을 매개로 책장 주인끼리, 책장 주인과 고객끼리 다차원적 커뮤니케이션이 이뤄지는 공간인 공유형 서점이 위축돼 가는 서점의 새로운 존립 모델이 될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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