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롬비아에 온 지 한 달 반이 흘렀다. 새로 나온 소설의 홍보차 고국을 방문한 건데 사람들은 나에게 한국에 대해서만 물어본다. 요즘 가장 화젯거리인 나라에 대해 알고 싶어서 다들 안달이다. 케이팝에서 보여주는 영상과는 완전히 다른 일상을 사는 내가 그들에게 줄 수 있는 대답은 실망스럽지만, 아주 현실적이고 유용한 답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편, 많은 사람이 남북관계에 대해서도 물어보는데 나는 그때마다 한국의 술집에서만 들을 수 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예컨대 몇 년 전 이태원의 한 술집에서 바텐더인 D가 나에게 칵테일을 만들어 주면서 했던 이야기다. 2012년 어느 날, 군 복무 중이던 D는 강원도 최전방의 산악지대를 순찰하고 있었다. 인적이 드문 산꼭대기를 돌아보던 중 펀치볼 계곡 근처에서 이상한 공간을 발견했다. 녹이 슨 붉은 파라솔이 보이는 건물에는 물이 말라버린 수영장이 있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한 D는 순찰을 지휘하는 장교에게 그곳의 역사를 물어봤다. 바로 아래에 비무장지대가 있으니 여름 휴양지가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사연인즉슨 1992년 한국군 총사령관이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의 수영복 심사 장소로 저 황량한 계곡에 수영장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미스코리아 후보들은 북한 땅이 내려다보이는 커다란 창문이 있는 방에서 지냈고 북한군은 단거리 망원경으로 휴전선 너머 이들이 꿈틀거리는 모습을 지켜봤다. 수영장은 그날 하루만 사용되고서 버려졌다.
내 옆에서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다른 손님이 D에게 물어봤다. “왜 그런 짓을 한 거래요?” D는 말을 멈추고선 라임을 잘라 칵테일에 짜 넣었다. 설탕을 첨가하고 머들러로 빻은 뒤 술과 음료를 넣고 화려하게 팔을 움직이며 섞은 후 커다란 잔에 칵테일을 따랐다. 그러고선 드디어 입을 열었다.
장교가 해 준 얘기에 따르면, 수영장을 건설하기 몇 달 전 북한군이 먼저 국경에서 아주 가까운 폭포에 여군을 보내 목욕을 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남한 군인들이 이 여군들이 물놀이하는 장면을 넋을 놓고 쳐다봤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 산꼭대기에 수영장을 만들고 미스코리아 후보들을 올렸다는 거다.
한국에 관해 묻는 사람들에게 뻔한 답변 대신 한국 사람들끼리만 아는 이런 얘기들을 들려주긴 하지만 항상 가십만 얘기하는 건 아니다. 이번에 내 고국 사람들이 알아줬으면 하는 한국의 면모는 화가 오우암 같은 예술가가 있다는 점이다.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지만, 작가들과 어울리는 건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대부분 따분하기도 하고 공허한 기분도 들기 때문이다. 대신 미술가나 음악가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는데, 그들 역시 매우 공허하지만 적어도 삶이 훨씬 더 흥미진진해 보인다. 그래서 책 출판 기념회보다는 전시회나 콘서트에 더 많이 간다. 오우암도 2022년 부산 비엔날레에서 처음 듣게 된 이름이다. 대부분 한국인에게도 오우암이라는 이름은 낯설 것이다. 그의 그림이 전시된 공간에 들어가자마자 단번에 나는 내가 아주 특별한 화가를 마주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의 그림에는 순진함과 강한 표현력이 섞여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원근법도 제대로 살아있지 않고 너무 단순해서 마치 아이가 그린 그림 같았다. 기차역, 공장, 거리 풍경, 작은 남자, 여자, 아이들이 캔버스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그런데 모든 그림 속 소재 하나하나가 세밀하게 그려져 있어 전체적으로 초현실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소재를 너무나 현실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오히려 더 꿈속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그가 색을 다루는 방식도 놀라웠다. 고백건대 나는 그의 파란색과 분홍색에 굴복당했다. 도대체 어디에서 이런 화가가 등장한 건지 궁금해졌다. 찾아보니 오우암 화백은 고아로 자랐고 30년 동안 수녀원에서 난방과 정원 관리를 맡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곳에서 여가를 보내며 그림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이다. 미대에 진학한 적은 없지만, 일제강점기부터 지하철의 모든 승객이 스마트폰을 보는 시대까지, 한국의 역사가 담긴 그림 세계를 조금씩 만들어 갔다. 누군가는 그의 그림을 두고 제도권이나 갤러리에서 벗어난, 공식적인 틀 밖에서 만들어진 작품이라며 1970년대에 ‘날것의 예술’이라는 용어로 설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여기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오우암 화백은 최근까지 비주류 예술가로 분류됐지만, 그의 작품은 20세기를 관통하는 유명 화가들과 당당하게 대화한다. 그리고 그는 전쟁을 겪고 고아로 지내던 삶 속에서 고통에 맞서기 위해 예술을 선택했다. 자신이 받은 타격에 대응하는 방식으로서, 수영장 이야기처럼 똑같이 갚아주는 게 아니라 예술을 택하는 것. 나는 그게 사실 가장 한국적이라고, 나의 책 출판회를 방문한 독자들의 질문에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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