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가 최근 진행한 설문 조사에서 MZ세대(밀레니얼+Z세대)들은 전문직, 공무원보다 대기업 직원을 선호 직업으로 선택했다. 안전 직장으로 문전성시였던 공무원 시험 지원율은 역대 최저를 기록했다. 현대차 생산직 채용에는 공기업 현직들까지 관심을 보이며 10만 명 이상이 몰렸다.
대기업 쏠림에 대한 청년들 목소리는 이렇다. “대기업은 안정적인데 고소득 안정이다.” “물가가 올라서 공무원 박봉 이미지가 더 세졌다.” “투자를 많이 해야 하는 전문직은 가성비가 떨어진다. 그런데도 경쟁력 없으면 웬만한 대기업에 못 미친다.”
실제로는 대기업 직원은 공무원, 공기업 직원보다 안정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대기업 일자리를 안전 직장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우리가 맞닥뜨린 일자리 기반의 현실을 보여준다. 어떤 일자리의 임금은 물가와 금리가 오르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가 현실이 됐다. 환율 상승과 원자재 가격 폭등, 금리 인상 탓이다. 세계의 변화를 나의 일자리가 따라잡지 못하는 것이다.
트럼프 당선과 우크라이나 전쟁, 중국의 몰락을 예측했다는 미국 지정학자 피터 자이한은 세계의 변화를 이렇게 설명한다. 안전한 항행과 저렴한 석유를 보장하던 미국 주도 질서 속에서 모든 국가는 자유무역과 산업화 혜택을 공평하게 얻었다. 국제 분업 시스템 속에서 중국이 많은 혜택을 입었고, 한국은 중국으로부터의 혜택까지 더해 성장 기회와 일자리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덧셈의 세계’가 막을 내리고 ‘뺄셈의 세계’가 열렸다. 역사를 통틀어 아주 이례적이었던 세계화 시대는 막을 내리고 있다. 흔히 말하는 ‘탈세계화’다. 언제든 적정가격에 원자재와 식량을 구할 수 있던 시스템이 무너진다. 제조업 중심이 북미로 돌아가면 아시아의 경제적, 정치적 안정은 유지될 수 있을까. 여기에 산업화가 빚어낸 고령화 인구 구조까지 더해지면 재앙이 닥쳐 온다는 것이다.
‘뺄셈의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덧셈의 자기장’ 안으로 들어갈 입장권을 손에 쥐어야 한다. 반도체 경쟁력이 곧 국가 안전인 대만의 TSMC는 최첨단 공정인 3나노 반도체 공장을 미국에 건설하기로 한 직후 2나노, 1나노 반도체를 대만에서 만들겠다는 카드를 꺼내 들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세상에 없는 기술에 우리 생존이 달렸다”고 호소한다. 세대와 인종을 뛰어넘는 다양성을 갖추기 위한 기업문화 혁신은 인구학의 재앙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다.
세계의 변화 속에서 일자리 안정성은 이제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한 절대 직장에서 잘리지 않는 힘’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변화 속도를 제대로 따라잡고 변화 속에서 우위를 찾아내는 힘’에서 나오게 됐다. 뼈를 깎는 변화를 실천해 그런 힘을 얻어가는 대기업들이 만드는 일자리 말이다.
1988년 영국 스코틀랜드 근처 북해 유전의 한 석유시추선에서 불이 났다. 우물쭈물하던 사람은 모두 죽었다. 차갑고 시커먼 바다로 뛰어든 사람 중 일부만이 살아남았다. 그 이후로 ‘불타는 갑판’은 큰 위험을 감수하고 변화를 선택해야만 하는 절박한 상황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된다. 불타는 갑판 위에선 차가운 바다가 제일 안전한 선택지가 된다는 얘기다. 몇몇 대기업을 제외한 나머지는 바다로 뛰어들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는가. 어쩌면 우리 일자리 기반은 벌써 불타는 갑판이 돼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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