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소니의 창업자 모리타 아키오가 30대 초반이던 1953년 처음 독일로 해외 출장을 갔을 때다. 식당 종업원이 디저트를 내오면서 아이스크림에 장식으로 꽂힌 종이 파라솔을 가리켜 일본산(産)이라고 소개했다. 환영하는 뜻에서 건넨 인사였지만 이는 모리타의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냈다. ‘글로벌 무대에서 일본은 고작 이 정도로 알려져 있구나. 갈 길이 멀다.’
이후 절치부심한 소니와 일본의 발전상은 모두가 아는 대로다. 1980년대 일본의 경제력은 미국마저 추월하며 세계 1등을 넘보는 나라가 됐다. 그 핵심 동력은 정부와 기업, 학계가 총력을 기울여 육성한 반도체 산업이었다. 모리타가 당시 일본의 극우 정치인 이시하라 신타로와 함께 쓴 ‘노(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이라는 책에는 “일본의 반도체 기술 없이 미국의 군사력은 유지될 수 없다. 미국에 고개 숙일 필요가 없다”는 내용이 나온다. 일본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 때였다.
베스트셀러 ‘칩워(Chip War·반도체 전쟁)’를 쓴 경제사학자 크리스 밀러에 따르면 미국이 반도체를 경제안보의 관점에서 바라본 것은 이 무렵부터였다. 후발주자 일본의 급부상으로 궁지에 몰리자 그동안 정부의 간섭도 지원도 마다했던 실리콘밸리 기업인들이 워싱턴을 제 발로 찾아갔다.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는 세금 지원, 지식재산권 보호 같은 카드를 내밀었지만 산업계의 위기감을 달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나온 게 1986년 미일 반도체 협정. 일본이 자국 내 미국산 점유율을 높이고 일본산의 미국 수출은 제한하는 굴욕적인 협정을 계기로 일본 반도체 산업은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
동맹국의 주력 산업을 완력으로 뭉개버린 미국의 다음 타깃은 적성국인 중국으로 옮겨갔다. 첨단 반도체 기술을 확보해 군사력을 확대하려는 중국의 굴기에 대응해 미국은 이른바 ‘숨통 끊기’(Chip Choke) 전략을 취한다. 핵심 반도체 기술·부품의 공급을 차단해 고부가 산업 발전의 사다리를 끊고 중국을 미국에 범접 못 하는 중진국으로 눌러 앉힌다는 계산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반도체 공급망의 한 축씩을 담당하고 있는 각국의 협조가 절대적이었다. 미국은 ‘칩4 동맹’을 만들어 동맹국들로 하여금 중국을 배제하도록 압박하더니, 최근엔 미국에 반도체 공장을 짓는 기업이 보조금을 받으려면 기업 비밀과 초과 이익을 공유해야 한다고 엄포를 놨다. ‘안보 우산’을 무기 삼아 우방국들을 쥐어짜고 패권을 수호하겠다는 것이다.
칩워는 ‘영원한 내 편’이 없는 각자도생 혈투다. 상대에게 얕보이지 않을 초격차 기술이 없으면 아무리 혈맹이라도 힘에 의해 휘둘리고 탈탈 털리는 신세를 면할 수 없다. 정부가 미국을 붙잡고 반도체지원법에 이의를 제기한다고 하지만 요청이나 부탁의 차원을 넘진 못할 것 같다. 협상의 지렛대를 얻으려면 본연의 힘을 키워야 하는데 그동안 우리에게 그럴 의지나 전략이 있었나. 마침 반도체 투자에 세제 지원을 확대하는 ‘K칩스법’이 여야와 정부의 공감대 속에 늦었지만 곧 처리될 수 있다고 한다. 설령 그게 된다고 해도 우린 아직 갈 길이 너무나 멀다. ‘3류 관료, 4류 정치’가 스스로의 발목을 잡는다는 오명도 떨칠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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