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든, 작년 한미 정상회담 등 계기로
한국 기업서 ‘100조 투자 보따리’ 챙겨
“지원” 약속하고 IRA·반도체법 ‘밑장빼기’
尹 4월 방미 시 바이든 ‘말빚’ 받아낼 책무
사업가를 뜻하는 영어 단어 ‘비즈니스맨(Businessman)’은 원래 영국에서 ‘공직자’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 단어가 지금과 같은 의미를 갖게 된 것은 미국으로 건너간 다음부터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미국은 어떤 나라보다 공직과 비즈니스 간의 경계가 희미하다.
“미국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비즈니스다(The chief business of the American people is business).” 캘빈 쿨리지 전 대통령이 남긴 말이다. 이런 점에서는 외교통이라는 조 바이든 대통령도 예외가 아닌 것 같다.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 이후 지금까지 한국과의 관계에서 보여 온 행보를 돌이켜 보면 ‘퍼스트 비즈니스맨’이라는 칭호가 가장 어울려 보인다.
바이든 대통령은 2021년 5월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한국 대기업들로부터 44조 원의 ‘투자 선물 보따리’를 챙겼다. 이어 지난해 5월 하순에는 한국을 직접 방문해 한국 대기업들의 ‘투자 보따리’를 100조 원으로 키워서 가져갔다. 이런 투자 계획들이 구체화하면서 한국 기업들은 지난해 어떤 외국 기업보다 많은 일자리를 미국 안에서 만들어 냈다.
바이든 대통령은 한국 기업에 ‘러브콜’을 보낼 때마다 지원 약속을 빼놓지 않았었다. 지난해 방한 당시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을 만나서는 “투자에 보답하기 위해 실망시키지 않도록 지원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고 했고, 삼성전자 평택공장을 방문해서는 “(한국 반도체 산업이) 양국 간 기술동맹을 통해 더욱더 발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바이든 대통령의 약속과 공언(公言)은 현재로선 ‘공수표’가 된 상태다. 현대차는 바이든 대통령이 서명한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의 최대 피해자가 됐다. 미국의 유력 일간지 로스앤젤레스타임스는 “현대차에 대한 미국 행정부의 기습공격”이라고 평가했고, 현대차 공장을 유치한 조지아주 팻 윌슨 경제개발부 장관은 “불이익과 모욕”이라는 표현까지 썼다. 그나마 배터리 업체들은 IRA의 수혜를 볼 것으로 예상했으나 미국 기업과 중국 기업이 손을 잡고 ‘IRA 우회로’를 찾으면서 자칫하면 헛물만 켠 꼴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반도체는 더 심각하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미국의 대중 반도체 수출 규제로 각각 33조 원과 22조 원을 투자해 놓은 중국 내 반도체 공장의 ‘업그레이드’에 심각한 제약을 받게 될 처지다. 여기에 더해 미국 정부는 한국 기업들이 미국에 공장을 지으면서 보조금을 받을 경우 영업기밀까지 들여다보겠다는 부대조건을 내걸었다.
이쯤 되면 미국의 ‘칼날’이 중국만 겨냥한 것인지, 한국을 비롯한 동맹국들까지 동시에 겨냥한 것인지 그 의도가 의심스러운데, 지나 러몬도 상무장관의 최근 언행에서 그 일단을 엿볼 수 있다. 러몬도 장관은 지난달 23일 한 강연에서 “난 미국이 모든 최첨단 반도체 생산 기업이 상당한 연구개발 및 대량 제조 시설을 둔 ‘유일한 국가’가 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작년 6월에는 러몬도 장관이 한국에 7조 원을 들여 공장을 짓는 방안을 검토 중이던 대만의 반도체웨이퍼 업체를 미국으로 ‘가로채 간’ 일도 있었다.
현재 한국 경제는 중증(重症)의 복합위기에 빠져 있다. 수출, 성장, 물가, 경상수지 어느 하나 성한 것이 없다.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의 부진한 성적표를 한 달이 멀다 하고 갈아 치우는 중이다. 더 큰 문제는 이것이 일시적인 지표상의 부진이 아니라는 점이다. 중국이 미국에 최종 소비재를 내다 팔고, 한국은 중국에 중간재를 수출하는 ‘비즈니스 모델’ 자체가 통째로 흔들리는 데서 오는 구조적인 위기라는 점이다. 중국시장이 급속히 위축되는 와중에 한국 기업들이 미국에 줄 것 다 주고 뒤통수까지 맞는 현실에서는 한국 경제의 비전이 보이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4월 말로 예정된 윤석열 대통령의 방미는 결코 허비해선 안 되는 기회다. 미중 간의 신냉전 구도 속에서도 ‘한국이 땅에 발을 딛고 설 자리’가 있다는 사실을 이번 방미에서 입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자면 사실상 ‘밑장 빼기’로 변질돼 가는 IRA와 반도체법을 ‘공정한 법’ ‘동맹과 같이 가는 법’으로 돌려 놓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미국의 ‘퍼스트 비즈니스맨’을 상대할 수 있는 카운터파트는 한국에서 ‘1호 영업사원’뿐이다. 결국은 윤 대통령의 숙제라는 이야기다.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지만, 바이든 대통령이 입 밖으로 꺼내 놓은 ‘말 빚’이 있기에 꼭 불리한 것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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