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교육계에서 2028학년도 대학 입시 제도 개편을 계기로 ‘논술형’ 대입 시험 도입 논의가 나오고 있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다섯 개 보기 중 답을 고르는 지금의 오지선다형 객관식 수능이 미래에 필요한 능력을 측정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챗GPT’ 등 인공지능(AI) 활용이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답을 찾는 능력’보다는 ‘질문하는 능력’이 중요해졌다는 것이다. 교육부는 2028학년도부터 적용되는 대입 개편 방안을 내년 2월 발표할 예정이다. 개편안에는 논술·서술형 시험 도입이 포함될 수 있다. 대입 시험에서 논술형 및 서술형을 적용하는 해외 사례를 통해 우리도 비슷한 방식의 대입 시험을 도입할 수 있을지, 그리고 도입 시 얻을 수 있는 기대 효과와 문제점을 살펴봤다.》
논술·서술형 대입 시험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해외 사례는 프랑스의 ‘바칼로레아’다. ‘학사’라는 의미의 바칼로레아는 프랑스 대혁명 이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황제로 재위한 1808년 시작된 이래 215년의 전통을 갖고 있다.
● 프랑스 바칼로레아 215년 역사
프랑스 고교생은 매년 6월 일주일간 치러지는 이 시험에서 만점의 절반 이상에 해당하는 점수를 받아야 대학에 진학할 수 있다. 2021년부터 도입된 ‘신(新)바칼로레아’는 학생 부담을 줄이기 위해 시험 과목을 줄이고, 구술시험을 강화했으나 큰 틀은 유지됐다.
바칼로레아는 ‘생각하는 힘’에 중점을 두고 출제된다. 객관식 문제는 하나도 없고 전부 논술형이다. 프랑스어 과목은 두 가지 문제 중 하나를 골라 4시간 동안 글 한 편을 써야 한다. 예를 들어, 17세기부터 현재까지의 프랑스 소설 속 등장인물을 제시하고, 이들이 얼마나 열정적인 사랑을 해야만 독자를 사로잡을 수 있는지 자신의 의견을 쓰는 식이다.
수학도 서술형으로 평가한다. 채점자들은 문제의 답이 아니라 수험생이 기재한 ‘풀이 과정’을 평가한다. ‘시험 범위’라는 것이 없는 상태에서 다양한 제시문이 나오기에 학생들은 평소에 독서를 하지 않았다면 문제를 푸는 것이 쉽지 않다. 책을 읽으면서 내용을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자신의 의견으로 소화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문제를 풀 수 있는 셈이다.
다른 유럽 국가들도 논술·서술형 대입 시험은 일반적이다. 독일 ‘아비투어’는 문학, 역사, 사회과학, 철학 등의 과목에서 논술·서술형 문항이 출제된다. 독일의 대문호 요한 볼프강 괴테의 시(詩)인 ‘새로운 사랑, 새로운 삶’을 지문으로 제시한 뒤 사랑에 대한 경험을 어떻게 서술하고 있는지를 분석하는 식이다. 이탈리아에서도 대학 입학을 하기 위해서는 문학, 역사, 시사와 관련된 7개의 주제 중 하나를 선택해 에세이를 써야 한다. 영국 A레벨도 주어진 지문을 바탕으로 하나의 글을 써 내는 방식이다.
유럽이 논술·서술형 대입 시험을 다수 채택하는 데에는 문화적 배경도 있다. 프랑스, 독일 등 철학과 문학 전통이 오래된 유럽 국가들에서는 ‘쓰기’가 지식, 비판적 사고 능력, 의사소통 능력을 평가하는 객관적이고 공정한 방법으로 여겨진다. 바칼로레아가 처음 도입된 17세기 유행한 계몽주의의 영향이라는 분석도 있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전통적인 권위에 도전하고 이성, 과학, 진보를 추구했는데, 새로운 아이디어를 표현하기를 장려했던 이들의 영향으로 논술형 대입 시험이 자리를 잡았다는 것이다.
● 美-日, 서술형 대입 시험 공정성 논란
반면, 미국 대학수학능력시험(SAT)은 2021년 6월부터 논술형 방식의 시험인 ‘에세이 시험’을 폐지했다. SAT 주관사인 미국대학위원회는 “학생들이 논문 작성 능력을 입증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기 때문에 SAT에서 에세이 시험을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에세이 시험은 2005년 도입됐으며 2016년 선택 사항으로 바뀌었다가, 평가 공정성 문제가 제기되면서 결국 퇴출됐다. 객관식처럼 기계적인 평가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평가자의 생각이나 선입견 등이 어느 정도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채점 비용을 포함한 관리비 부담이 커진 것도 퇴출 이유 중 하나”라고 전했다.
에세이 시험이 지나치게 형식화된 글쓰기 방식을 조장한다는 비판도 계속 받아 왔다. ‘시험에 특화된 글쓰기’에만 학생들이 몰두한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2005∼2015년에도 에세이 점수를 반영하지 않는 대학들이 많았다.
일본도 2021학년도부터 적용된 ‘대학입학공통테스트’에서 일본어, 수학에 서술식 문제를 도입할 예정이었으나 무기한 보류했다. 한 해 50만 명에 달하는 수험생의 답안을 공정하고 정확하게 채점할 수 있느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졌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민간 회사에 채점을 위탁할 예정이었으나 모의고사 채점 때 학생을 아르바이트로 동원한 것으로 밝혀지면서 논란이 더 커졌다. 일본 문부과학성은 “각 대학이 개별적으로 치르는 시험에서 서술식 문제를 활용해 달라”고 한발 물러섰다.
논술·서술형 대입 시험의 본고장인 유럽에서도 평가 공정성을 두고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역사가 가장 긴 프랑스 바칼로레아는 아직도 공정성 논란이 계속 제기되는 상황이다. 프랑스 매체 ‘필로소피 매거진’은 ‘바칼로레아 철학 시험은 로또인가’라는 제목의 기사로 논술형 시험을 비판했다. 채점 과정에서 주관이 개입할 여지가 있으며 채점 기준도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바칼로레아가 현실과는 동떨어진 채 지나치게 형이상학적인 문제만 출제해 오히려 실용성이 없다는 비판도 나온다.
● 전문가 “수능은 미래 역량 평가 어려워”
공정성 시비에도 불구하고 논술·서술형 대입 시험으로의 전환은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지적이 국내에서 나오고 있다. 송진우 서울대 물리교육학과 교수 연구팀은 지난해 ‘미래형 교육체제 전환에 따른 서·논술형 기반 학교 평가 및 대학입시 개선 방안 연구’에서 “현재 수능은 처음 취지에서 벗어나 교과 학력고사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며 “수학 능력의 측정은 범교과적인 학력을 측정하고 미래 사회에 부합하는 역량을 평가하는 방향으로 재조정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홍후조 고려대 교육학과 교수도 “현재 수능은 ‘대학에서 공부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를 평가한다는 당초 목적과는 다른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며 “그동안 채점의 편의를 위해 객관식으로 수학 능력을 평가했으나 탐구라는 공부의 본질은 논술·서술형을 통해서만 제대로 평가할 수 있다”고 말했다.
2025학년도부터 적용되는 ‘2022 개정 교육과정’의 도입에 따라 지금이 객관식 수능 체제를 개편할 적기라는 평가도 나온다. 최숙기 한국교원대 교수는 지난달 27일 열린 제4차 2028 대입 개편 전문가 포럼에서 “2022 개정 교육과정에서는 논술·서술형 평가 비중 확대를 총론과 각론에서 논의하고 있다”며 “고교학점제 시행과 맞춰 수능이 달라져야 한다는 근거를 깔아주는 셈”이라고 말했다.
채점 공정성에 대한 문제는 AI 기술의 발달로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해외에서는 이미 AI가 논술·서술형 과제를 평가하는 시스템을 이용하고 있다. 미국 애리조나주립대는 온라인 강의의 에세이를 채점하는 데 ‘자동 에세이 평가(AES)’라는 AI 프로그램을 사용한다.
● ‘평가 방식 논란-사교육 팽창’ 우려
이른 시일 내 한국이 논술·서술형 대입 시험을 도입하는 것은 어려울 것으로 보는 의견도 있다. AI를 활용한 평가를 도입한다고 가정해도 문제가 많다는 것이다. 가령, AI가 수험생의 창의적인 답변에 대해 ‘평균값을 벗어났다’는 이유로 낮은 점수를 줄 수도 있다. 송기창 숙명여대 명예교수는 “현재 객관식 수능에서도 정답을 놓고 소송이 벌어지는 상황”이라며 “주관식을 채점할 경우 결과에 승복하지 못하는 수험생과 학부모는 더 많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논술·서술형 대입 시험을 도입하기에 앞서 초중고 학교 현장의 평가와 수업 방식이 논술·서술형에 맞게 바뀌는 게 우선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학생부종합전형(학종) 설계자’로도 불리는 김경범 서울대 서어서문학과 교수(전 서울대 입학본부 전형실장)는 “고교 내신 평가 체계가 논술·서술형으로 바뀌고, 수업 형태가 사고력을 키우는 방식으로 바뀌지 않는 상태에서 논술·서술형 수능이 도입된다면 사교육 부담만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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