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일본 모두 가장 사이가 좋았던 때라고 꼽는 1998년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小渕恵三) 일본 총리가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을 맺을 때도 일본에서 마냥 환영하는 반응만 나온 것은 아니다.
총무상 시절 “일본은 식민지 시대 한국에 좋은 일도 했다”고 망언한 에토 다카미 의원은 김 대통령이 아키히토(明仁) 일왕과 만찬을 한 날에도 “한국 대통령과 일본 총리가 바뀔 때마다 (일본이) 사과와 반성을 하는 것은 이상하다”고 해 물의를 빚었다. “한일 기본조약으로 해결했는데 이제 와서 웬 사죄냐” “식민지 지배를 인정하면 한국이 청구권을 들고 올 것” 같은 말들이 집권 자민당에서 나왔다.
하지만 김 대통령은 일왕 만찬장에서 과거사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자신이 생사기로에 놓였던 납치 사건(1973년 중앙정보국이 일본에서 김 대통령을 납치한 사건)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다. 한일 관계에서 대승적 태도를 보여 주도권을 놓지 않겠다는 전략적 판단에서였다. 한국의 통 큰 태도에 오부치 총리는 기자회견장에서 “일본 정부 책임 있는 사람들이 서명했기 때문에 앞으로 이를 왜곡하는 발언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오부치 총리의 이 발언은 안타깝게도 이후 지켜지지 않았다. 이는 전적으로 일본 책임이다.
거센 논란 속에도 한국 정부가 과감하게 일제 강제동원 피해 배상 해법을 결론 내린 배경은 25년 전과 다르지 않다. 한일 양국의 미래지향적 협력을 위한 큰 결단이라는 것은 일본에서도 공감하는 부분이다. “한일 관계를 양자 관계 틀로만 보는 일본의 시야가 좁다.” “글로벌 국가 전략으로 한일 문제를 다루는 한국이 일본보다 낫다.” 일본 한반도 전문가들이 기자에게 들려준 냉정한 평가다.
북한 핵과 미사일 위협, 중국의 강화되는 해양 진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엄중해진 동아시아 정세를 고려하면 양국이 과거사로 다툴 여유가 없다. ‘왜 피해자인 한국이 양보하느냐’는 비판이 한국에서 나오지만 거꾸로 보면 이렇게 대승적이고 과감한 결단이기 때문에 미국 유럽 등 국제사회에서 평가받고 있다.
“한국은 언제나 사죄만 요구한다”고 일본이 퍼뜨린 ‘한국 피로증’은 한국이 스스로 끊어냈다. 지난 10년 넘게 제대로 다루지 못했던 한일 관계의 공도 일본에 넘겼다. 이제 일본이 과거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5년 전 일본 총리가 문서로 약속한 사죄와 반성조차 총리 입으로 되풀이하지 못하겠다는 태도는 ‘일본 외교의 퇴행’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강제동원은 없었다. 이미 다 끝난 일”(하야시 요시마사 일본 외상)이라며 역사적 사실조차 왜곡하는 태도는 한일 관계 개선의 장애물이다. 일본 최고 명문 가이세이고교 출신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총리는 지난해 모교 창립 150주년 기념 회보에 “시대적 전환기에 여러 어려움을 극복하고 새로운 시대를 개척해 나가야 한다”는 글을 썼다고 한다. 지금 한일 관계에 딱 들어맞는 말이다.
우리 정부도 ‘할 일 다 했다’는 태도는 지양해야 한다. 강제동원 피해자를 위로하고 반발하는 국민을 설득해야 한다. 그동안 정부가 두 차례 보상을 했어도 피해자들은 한일 협정에 따른 식민지배 청구권 자금을 제철소와 고속도로 짓는 데 쓰느라 충분한 보상과 일본의 사죄를 받지 못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국가 대의와 외교 전략이 옳아도 역사가 인간에게 남긴 응어리를 치유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피해자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있어야 통 큰 대일 외교도 국내에서 성공할 수 있다. 그래야 일본도 피해자들의 존엄성을 존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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