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2월, 콘라트 아데나워 서독 총리는 자신의 집무실에서 미국인 손님 두 명을 맞았다. 독일계 학자 헨리 키신저 하버드대 교수와 월터 다울링 주독 미국대사였다. 당시는 소련 핵 위협과 베를린 위기가 최고조에 달하던 시절. 미국의 유럽 방어공약에 대한 의구심이 높아지면서 서독도 핵무장 같은 다른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러자 존 F 케네디 행정부가 동맹에 대한 미국의 신뢰 회복을 위해 마련한 ‘특별 브리핑’ 자리였다.
하지만 아데나워로선 마뜩잖을 수밖에 없었다. 키신저가 미국의 방위공약 설명으로 서두를 꺼내자 아데나워는 대뜸 말을 끊었다. “워싱턴에서 이미 들은 얘기요. 거기서도 날 납득시키지 못했는데….” 자신은 관료가 아닌 학자이니 다 듣고 판단해 달라는 키신저에게 아데나워는 “미국 정부의 자문에 당신 시간을 얼마나 쓰느냐”고 물었다. ‘약 4분의 1 정도’라는 답변에 아데나워는 “그러면 진실의 4분의 3을 얘기해주는 셈 치자”고 응수했다.
그렇게 시작된 브리핑에서 키신저가 미소 간 핵전력 격차를 설명하자 아데나워의 태도는 바뀌기 시작했다. 키신저는 소련의 핵 선제공격(제1격)에 대응하는 미국의 반격(제2격) 능력은 더욱 크고 훨씬 효과적이며, 당연히 미국의 1격 능력도 소련을 압도한다고 했다. 브리핑에는 미국의 핵전력 구조와 핵사용 계획 같은 민감한 세부정보가 포함됐다. ‘특별한 동맹’ 영국과만 공유하던 1급 비밀이었다.
아데나워는 자리를 뜨려는 키신저를 두 번이나 붙잡으며 “자유를 지키기 위해 어떤 힘을 가졌는지 알게 돼 안도했다”고 거듭 감사를 표시했다. 다만 “이제 주요 과제는 사람으로 인한 허점이 없도록 하는 일”이라고 덧붙였다. 키신저는 ‘대서양 동맹에 대한 미국의 힘과 헌신을 얘기할 때 그건 그저 한가한 수사가 아니다’라고 재삼 강조했고, 아데나워는 “그럼 다행이다!”라며 손님을 보내줬다.(키신저의 책 ‘리더십’에서)
날로 고도화되는 북핵 위협 속에서 미국의 확장억제 공약에 대한 한국의 의구심은 1960년대 초 서독의 기류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파리나 본을 지키기 위해 워싱턴과 뉴욕의 위험을 감수하겠느냐는 것이 당시 유럽의 질문이었다. 프랑스는 미국 핵 의존이 아닌 독자 핵무장의 길을 갔고, 서독은 전범국가의 굴레 속에서 깊이 갈등했다. 한국도 어쩌면 그런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두 달 전 윤석열 대통령의 ‘자체 핵 보유 가능’ 발언도 그 의도가 뭐였든 같은 맥락에서 미국에 질문을 던진 것이나 다름없다. 그 발언 이후 미국에선 화들짝 놀란 듯 한국의 비확산체제 이탈 가능성에 대한 경고와 설득, 회유조의 제언들이 쏟아져 나왔다. 사실 그 반응은 대체로 곱지 않았다. 박정희 정부 시절 비밀 핵개발 전력을 소환하며 동맹의 파열음을 경고하거나 윤 대통령이 어휘 선택에 주의해야 한다며 말조심을 주문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 논란 속에 워싱턴의 논의가 핵 정보 공유와 공동 계획 등 확장억제의 신뢰성 강화로 모아지는 것은 다행스럽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핵계획그룹(NPG) 같은 기구를 신설해 한국을 참여시키는 구상이 대표적이다. 비밀의 공유는 동맹의 끈끈함을 보여주는 시금석이다. 내달 윤 대통령의 미국 국빈방문에서 신뢰에 바탕한 구체적 성과물이 나오길 기대해본다.
다시 아데나워 얘기. 키신저는 수십 년 뒤 당시 브리핑에 배석했던 아데나워의 통역으로부터 뜻밖의 편지 한 통을 받았다. 그에 따르면 아데나워는 그 다음 날 통역이 정리해온 브리핑 내용에서 핵 관련 부분은 파기하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미국이 요청한 비밀유지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