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호주에 갈 기회가 있었다. 다른 나라에 가면 매번 한국보다 불편한 점들을 꼭 찾아내고 오는 편인데, 내가 어렸을 적에 호주에서 머물렀던 좋은 기억들이 있어서이기도 하겠지만 이번엔 조금 달랐다. 날씨도 너무 좋았고 예쁜 도시 풍경, 여기저기 볼거리들, 저렴한 대중교통과 여러 신선한 음식점이 즐비했다.
그러나 어떤 것도 완벽하긴 힘든 법. 호주에서도 불편한 점을 두 가지 발견했다. 첫째, 모든 상점이 너무 일찍 문을 닫았다. 보통 오후 6시면 백화점과 모든 상점에서 영업이 끝나고 오후 7시쯤 음식 주문을 마감하는 식당도 적지 않았다. 일주일에 하루나 이틀 휴점하는 상점은 다반사였다. 소비자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지만 근로자 입장에서 보면 호주에서 사는 것은 천국이나 다름없을 듯했다.
호주에서 두 번째 중요한 문제는 맥주 구입이었다. 한국에선 아무 마트에 가도 술을 언제든 구매할 수 있다. 외국 친구들이 한국에 처음 와서 배우는 것 중 하나가 수입 맥주를 4개 1만 원에 살 수 있는 편의점이 곳곳에서 새벽 영업을 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호주에서는 편의점에서도, 대형마트에서도 무알코올 맥주를 제외하고는 술을 살 수 없다. 그 대신 ‘Bottle shop’이라고 부르는 주류 판매점에서만 술을 구매할 수 있다.
뭐 여기까지는 다 좋았는데, 이 주류 판매점들도 모두 오후 8, 9시 사이에 문을 닫아 버리는 게 문제였다. 내가 머무른 호텔의 2km 반경 이내에 15곳 정도의 주류 판매점이 있었는데 딱 2곳만 오후 9시 넘어서까지 영업을 했다. 호주에 같이 갔던 내 친구가 다소 진지하게 거기 주인들이 모두 한국인일 거라며 내기를 하자고 했는데 나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기에 응했다.
가게에 들어서자 아니나 다를까, 한국어로 장부를 적고 있는 한국인 사장님이 보였다. 벽에 세워져 있는 냉장고에는 여러 종류의 소주와 한국 맥주가 즐비했다. 이번에 호주에 와서 소주를 길거리에서 마시는 젊은 친구들이 많았던 광경도 충격이었고, 내기에 져서 또 한 번 충격에 빠졌는데, 한편으로는 슬픈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 수천 km 떨어진 호주에서조차도 늦게까지 일하는 사람들은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말이다.
최근에 한국에서는 근로시간 개편안이 화두다. 주 52시간인 근로시간을 한 주에 최대 69시간으로 연장하는 대신 장기휴가나 축소 근무시간을 허용하겠다는 내용이다. 이 내용은 많은 한국 사람들에게도 충격적이지만 한국에 시집 장가를 든 영국의 며느리와 사위들 사이에서도 그랬다. 현재도 일주일 내내 일하는 때가 다반사이고 밤늦게까지 상사가 전화를 걸어오는 근로문화가 못마땅한데 이보다 더 심해질 수도 있겠다는 불평들이었다.
나 또한 한국에서 꽤 큰 회계법인에 근무해 본 적이 있는 한 사람으로서 한국의 근로시간이 악명 높다는 것을 안다. 거의 10년 전 일이긴 하지만, 그 당시 하루에 20시간을 넘겨서 며칠을 일하고 어떤 때는 사무실에서 밤을 새우고 다음 날 근무시간을 다 채워서 퇴근하는 때도 있었다. 지금과 그때는 그래도 상황이 달라졌다고 믿고 싶지만 그렇게 일만 하는 삶은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너무 가혹한 일이었다. 같은 회사의 영국 법인에서 일했을 땐 그런 일 없이도 회사는 잘 돌아갔다.
물론 합리적으로 책정된 초과근무 수당을 위해 자발적으로 일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반대가 없다. 그러나 눈치 보는 기업문화 때문에 가족과의 삶을 포기하면서까지 일해야 하는 사회적 상황이 여전히 존재하는 한 새로운 근로시간 개편안은 우려스럽다. 근로시간을 근로자가 편한 대로 조정해서 열심히 일하고 한 달 동안 휴가를 간다는 발상은 매우 이상적이지만 도대체 어떤 관리자가 이를 달가워할 것이며, 정상적인 근로자 중 누가 한 달 휴가를 눈치도 없이 버젓이 요구할 수 있겠는가? 쉼이 일만큼이나 중요하다는 업무 철학이 먼저 형성되는 것이 근로시간 연장보다 지금 단계에서는 더 필요한 일인 듯싶다.
한국은 아직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일을 가장 오래하고 생산성은 가장 낮은 나라 중 하나다. 일주일에 69시간 근무는 너무 가혹할 뿐만 아니라 출산율 증대를 위한 노력에도 역행하는 일이 될 수 있다. 영국에서는 모든 게 ‘거꾸로’라는 뜻으로 귀엽게 놀리는 의미에서 호주를 ‘Down Under’라고 부른다. 그런데 아마도 호주의 근로문화만큼은 우리가 ‘똑바로’ 배워야 할 가치가 아닐까 한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