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에 수업이 끝나 점심 식사를 마치고 대학교 캠퍼스 주변을 혼자 걸으며 한 바퀴 돌았다. 아직 날씨가 쌀쌀하며 춥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봄이 우리 곁에 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산수유와 개나리가 활짝 피어 주변을 노랗게 물들였고, 햇볕이 잘 드는 곳에는 진달래도 두세 송이 피기 시작했다. 이번 주말에는 노란색에 꽃분홍이 어우러진 한국의 화사한 봄 풍광이 펼쳐질 것 같다.
올해로 대학에 몸담는 지 28년째가 된다. 매년 찾아오는 봄인데 올해는 특별한 느낌이 든다. 4년 만에 입학식이 열렸고, 1학년 오리엔테이션도 강의도 첫날부터 전부 대면으로 이루어졌다. 이제 개강한 지 4주째가 되는데 마스크를 벗는 기회도 늘어나 간간이 학생들의 얼굴을 직접 보게 된다. 4학년 학생인데 처음 보는 얼굴도 있어 신기하고, 학생들의 표정을 직접 느낄 수 있어 무척 반갑다.
이른 아침부터 오후까지 교정을 가득 채운 학생들의 밝은 발걸음도 그렇고, 모처럼 대면으로 치러지는 각종 교내 행사들로 조금은 들뜬 분위기가 여간 반갑지 않다. 강의실 복도나 교내 식당에서 즐겁게 나누는 대화들, 운동장에 삼삼오오 모여 가벼운 구기를 즐기거나 뭔가를 하려는 달뜬 미소들, 학생이나 교수나 교직원들이나 모두가 바쁘지만 여느 해보다 즐거운 3월을 보내고 있다.
일본의 새 학기는 한국보다 한 달이 늦은 4월이기 때문에 그 풍경도 다르다. 나의 새 학기 기억은 늘 벚꽃과 함께 있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입학식 풍경에는 만발한 벚꽃 가로수 사이로 꽃잎이 흩날리는 길을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걸어가고 있는 내가 보인다. 아마 비슷한 세대 일본인들은 비슷한 기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일본의 새 학기 시작의 풍경은 아련하고 연한 분홍빛이다. 그래서일까. 일본에서는 이와이 슌지 감독의 ‘4월 이야기’처럼 새 학기를 다루는 수많은 드라마나 영화에서 벚꽃 장면을 빼놓지 않고 담아낸다.
하지만 현실은 크게 변했다. 일본 ‘기상청 기온변동 리포트 2019년’에 따르면 1988년 이후 벚꽃 개화는 늘 3월이었고, 4월에 개화하지 않았다고 한다. 온실가스 배출량 증가에 따른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벚꽃 개화 시기는 10년에 하루씩 그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요즘 일본에서의 벚꽃은 ‘입학식 꽃’이 아니라 3월에 피는 ‘졸업식 꽃’이 되어버렸다. 일본 기상청의 발표로는 올해는 평균보다 열흘 빠른 3월 14일 도쿄가 전국에서 가장 먼저 벚꽃이 개화했다고 한다. 이제 벚꽃구경 행사인 하나미(花見)를 위해 학교 신입생들이나 회사 신입사원들이 아침부터 자리를 지키는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나의 이름 ‘지하루(千春)’는 ‘수많은 봄, 그득한 봄’이라는 뜻이다. 아버지가 영화를 보면서 마음에 들었던 여주인공의 이름을 떠올리며 지었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그 나름으로 세련된 이름이지만, 한국에 오고 나서 한자 발음으로 ‘천춘’이라 불리기도 해 촌스럽다 느껴진 적도 있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내 생각이 달라졌다. 세상 모든 일이 시작되고, 예쁜 꽃이 피는 따뜻한 봄이 기다려지는 만큼 ‘봄’이 소중하게 느껴지게 되었다. 내 이름 속에 담긴 ‘봄’이 자랑스러워 아버지께 감사드리는 마음이 해마다 커져가고 있다. 코로나를 겪고 나서 그런 생각은 더욱 커졌다.
아직 실내에서는 마스크를 벗는 것은 조심스럽지만 나도 야외에서 그리고 강단에서는 용기를 내 마스크를 벗으려 한다. 비록 그동안 마스크에 기대어 관리를 소홀히 하는 바람에 어쩌면 좀 더 노화된 얼굴일지라도….
나는 대학 캠퍼스에서 학생들의 환한 미소를 보는 것이 너무 기쁘다. 그리고 쉬는 시간에 서로 이야기하며 환하게 웃는 소리가 정말 반갑다. 오고 가는 학생들의 모습이 아름다운 꽃이 피는 봄기운과 함께 나의 마음까지 환하게 비춘다. 대학 캠퍼스에서 학생들의 밝은 미소와 재잘거리는 이야기 소리들이야말로 둘도 없는 꽃이다. 개나리, 진달래 등 학교 곳곳에 피기 시작한 꽃 못지않게 반가운 학생들의 모습이 교정을 그득 채워주고 있어 봄날을 만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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