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에서 시작된 은행시스템 위기 확산을 의식해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기준금리 인상의 보폭을 줄였다. 연준이 그제 0.25%포인트 ‘베이비스텝’을 밟으면서 미국의 기준금리는 15년 반 만에 최고인 4.75∼5.0%로 높아졌다. 게다가 연준 의장은 “연내 기준금리 인하는 없다”고 공언해 글로벌 경기 침체가 장기화할 가능성이 커졌다.
제롬 파월 의장은 이날 “올해 금리 인하가 있을 것으로 보지 않는다. 더 올릴 필요가 있다면 그렇게 할 것”이라고 했다. 고금리의 충격에서 비롯된 은행 연쇄파산 사태를 고려해 금리 인상 폭을 줄이긴 했지만, 아직 6%대에 머물고 있는 고물가와의 전쟁을 연말까지는 멈추지 않겠다는 의미다. 미국의 금융계는 연준이 금리를 0.25%포인트 더 올린 뒤 동결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다음 달 기준금리를 결정해야 하는 한국은행은 부담을 다소 덜었다. 연준이 ‘빅스텝’을 밟았다면 3.5%인 한국과 1.75%포인트까지 벌어질 뻔했던 금리 차가 1.5%포인트에 그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5%대의 높은 기준금리와 은행 파산의 여파로 세계 최대 시장인 미국의 경기가 급속히 냉각될 경우 이미 반도체, 대중 수출 감소의 충격을 받고 있는 우리 경제는 더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정부가 기대하는 것처럼 상반기에 저조한 경기가 하반기에 살아나는 상저하고(上低下高) 효과도 기대하기 힘들게 된다.
장기화하는 수출 둔화, 내수 위축은 4%대의 물가보다 한국 경제에 더 큰 위협이 돼가고 있다. 올해 들어 이달 20일까지 발생한 무역수지 적자가 241억 달러로 이미 역대 최대였던 작년 연간 적자의 절반을 넘어섰다. 고금리로 인한 이자 부담 증가와 고물가 탓으로 1월 소매판매가 전달보다 2.1% 줄어드는 등 소비 위축 징후도 뚜렷해지고 있다.
글로벌 긴축과 금융시스템 불안이란 외부 악재, 성장 동력 약화란 내부의 도전이 동시에 닥치고 있다. 지금은 정부, 한은의 작은 판단 착오도 경제를 위기에 빠뜨릴 수 있는 시점이다. 한은은 금리 차로 인한 자본유출을 막으면서, 금융시스템 안정을 지켜낼 수 있는 금리의 적정선을 찾아내야 한다. 세금까지 덜 걷히는 상황에서 경제의 활력을 끌어올리는 길은 투자 확대뿐이다. 정부는 반도체·전기차·배터리 등 첨단 분야 대기업들이 약속한 대규모 국내 투자가 연내에 조속히 실행될 수 있도록 모든 조치를 강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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