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용산구 리움미술관에서 무료로 열리고 있는 ‘조선의 백자, 군자지향’ 전시는 눈이 호강하는 궁극의 자리다. 어두운 전시실에 들어서자 흰 달이 여럿 떠 있는 듯했다. 1996년 크리스티 뉴욕 경매에서 841만 달러(약 110억 원)에 팔리며 조선백자 역대 경매 최고가를 기록한 ‘백자철화 운룡문 호(壺)’도 있었다. 지난주 방한해 국내 재계 오너들을 만난 베르나르 아르노 루이비통모에에네시(LVMH)그룹 회장도 이 전시에 다녀갔다.
국보 10점과 보물 21점을 포함한 전시가 가능한 건 삼성의 힘이다. 특히 185점의 전시품 중 42점은 호암미술관과 리움미술관 소장이다. 고(故) 이병철 삼성 창업회장은 1938년 대구에서 삼성상회를 설립한 후 대구 사람들과 미술품을 주고받다가 수집의 규모와 수준을 늘렸다. “개인의 수집품이지만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이기 때문에 국민 누구나 쉽게 볼 수 있게 하겠다”며 1982년 경기 용인시에 문을 연 게 호암미술관이다.
백자 마니아였던 고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도 “한국의 명품 문화재가 해외로 나가서는 안 된다”며 ‘국보 100점 수집 프로젝트’를 추진해 2004년 리움미술관을 열었다. 1993년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는 ‘신경영 선언’을 한 뒤 문화재 수집에도 ‘명품 경영’을 도입한 결과다.
이달 초 대구에 다녀오면서 기업이 남기는 유산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다. 대구미술관의 이건희 컬렉션 전시는 평일인데도 붐볐다. 대구시는 이병철 창업회장이 서문시장에 세운 삼성상회 터와 인근 이건희 선대회장 생가 등을 엮은 ‘경제신화 도보길’을 골목투어로 개발해놓았다. 삼성상회 터에서 시작하는 이 투어의 마지막 코스는 삼성이 2017년 조성한 대구삼성창조캠퍼스. 삼성전자가 지역의 스타트업을 발굴해 지원하는 ‘C랩 아웃사이드 대구’도 최근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요즘 “삼성이 달라졌다”는 말을 듣는다. 스타트업들에 삼성의 기술을 내주고 함께 연구 개발하는 개방형 혁신을 시도하기 때문이다. 삼성은 반도체 등 일부 품목을 ‘국가 대표’로 내세워 성장했지만, 기술 발전 속도가 빨라져 혼자 다 할 수 없는 세상이 됐다. 해외 기업들은 활발한 인수합병을 통해 리스크를 분산시키고 있다. 신경영 선언 30년. 삼성이 한국의 ‘작은 영웅’(스타트업)들을 ‘수집’(투자)한다면 다품목 체제를 확보하고 산업 생태계도 키울 것이다.
하루아침에 길러지지 않는 게 안목이다. 대를 이어 한국의 명품 문화재를 알아본 삼성의 안목이라면 한국의 명품 스타트업도 못 골라내란 법 없다. 스타트업을 제값 주고 품는 군자의 큰길을 걸으면 대기업이 스타트업 기술을 베낀다는 얘기도 듣지 않을 수 있다. 한국의 스타트업은 국내 대기업들로부터 덜 대접받을 뿐, 눈 밝은 해외 기업들로부터는 러브콜을 받고 있다.
한 말씀, 더. 대구삼성창조캠퍼스에는 삼성상회를 재현한 건물이 6년째 외형만 갖춘 채 내부를 단장하지 못하고 있다. 삼성은 2017년 국정농단 재판 후부터 매년 3월의 창립기념일을 조용히 보내고 있다. 이젠 우리 국민에게도 군자의 큰마음이 필요하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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