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기만, 자기를 ‘기만(欺瞞)’한다는 말에는 ‘속인다’는 말이 반복 강조됩니다. 아주 흔한 심리적 현상인 자기기만은 나를 남과 비교하면서 내 능력, 인물, 매력 등을 객관적인 시각보다 부풀려 내 마음에 새기는 겁니다. 사람은 그렇게 흔히 자신을 속이고 삽니다. 그러면 힘든 세상을 살아갈 기운이 돌고 자신감도 생기며 미래를 막연히 불안하게 바라볼 필요가 줄어듭니다. 잘난 사람, 못한 사람 있는 세상에서 애써 잘난 맛에 살려고 하는 겁니다.
자기기만은 나와 나의 관계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남들과의 관계에서도 이로운 점들이 있습니다. 일단 내가 나를 속여서 내 잘못을 감추면 내 기분과 자존감이 높게 올라갑니다. 그렇게 얻은 자신감을 써서 남들을 효과적으로 설득하고 이끌 수 있습니다. 그러니 남들을 속이기 전에 나 자신부터 철저하게 속여 투자 대비 효율을 높이는 겁니다.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하려면 나부터 깔끔하게 속여야 합니다. 그래야 들킬 가능성이 확 줄어듭니다. 남들을 속이려는 사람은 초조하고 불안해서 이런저런 티를 내기 마련입니다. 표정, 손 떨림, 말투에서 어쩔 수 없이 드러납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자신의 도덕과 양심이 자신에게 시비를 계속 걸기 때문입니다. “뻔히 알고 있으면서 어떻게 그런 거짓말을!”이라고 내 초자아가 나를 호되게 꾸짖습니다. 그런 일을 피하려면 내가 나를 완벽하게 속여야 남을 제대로 속일 수 있습니다. 사실인 것처럼 꾸미는 것이 아니고 사실이라고 믿고 말해야 남들이 제대로 믿습니다. 대놓고 하는 거짓말이 혹시 마음에 자꾸 걸리면 다른 방법들도 있습니다. 핵심적 진실을 피하면서 논점을 애매하게 만들거나, 부분적 사실을 과장해서 전체를 사실로 탈바꿈시키거나,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의심하는 말을 반복해서 던지면 됩니다. 참말이 아닌 거짓말을 남들의 마음에 흔들리지 않게 심으려면 사실을 계속 외면하거나 비틀어서 달리 해석하거나 심지어 기억을 흐리게 만들면 됩니다.
마냥 다 좋기만 한 일은 없습니다. 자기기만에 빠져서 잃는 점들도 만만치 않습니다. 근본적으로는 거짓을 믿으면서 참된 자기를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잃지 않으려고 거짓을 자신에게 계속 주입하면서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결국 무너지는 자신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착각 속에 살면 앞날을 예측하는 능력이 둔감해집니다. 진실을 알려는 노력도 포기하면서 취득하는 정보의 균형이 흐트러집니다. 편협한 세계관을 가지게 됩니다. 왜곡된 기억을 스스로 진짜로 믿게 되면 판단 기능 전체가 흔들립니다. 요약하면 내가 나를 보호하려고 내가 나를 속였으나 해결이 더 어려운, 근본적인 위기 상황에 내몰리게 됩니다.
안타깝고 불행한 일이지만 자기기만에 익숙한 사람들은 습관을 쉽게 버리지 못합니다. 쉽게 얻을 수 있는 이롭게 보이는 점들이 너무나 매력적이라는 중독성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내가 나를 속이는 자기기만은 내가 남을 속이려는 행위에 비해 마음에 갈등을 덜 일으킵니다. 나와 나의 관계이니 머리를 많이 쓰지 않아도 됩니다. 남을 내가 속이는 일은 아무리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조심해 시행해도 위험이 따릅니다. 성공적으로 속이지 못하면 비난이나 처벌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반면에 내가 나를 속이는 일은 훨씬 쉽습니다. 정신 에너지를 많이 쓸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나를 속이는 일에 도가 트이면 남들은 식은 죽 먹듯 속일 수도 있을 겁니다.
일단 내가 나를 속이고 나서 남들을 속였다가 들킨다면 두 가지 변명이 가능합니다. “나도 전혀 몰랐습니다” 그리고 “능력이 너무 부족해서 그렇게 되었습니다”라고 하면 말이 됩니다. 나 자신도 몰랐는데 어떻게 감히 남들을 속일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게 빠져나가려 할 겁니다.
자신을 속임으로써 얻는 자신감 역시 큰 몫을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감에 넘친 지도자를 원합니다. 자신감을 보여야 남들을 움직여 나를 따르게 할 수 있습니다. 남들이 나를 믿고 따르면 자기기만의 유효기간이 확 늘어납니다. 자기기만이 오래 지속될수록 나중에 치러야 할 대가는 늘어납니다. 그러니 남을 깎아내리고 공격하는 방식과 똑같이 움직여서 자신을 보호해야 합니다. 공격이 최선의 수비인 점을 아는 겁니다.
남을 속이려는 사람을 찾아내기는 비교적 쉽습니다. 거기에 반해 자신이 자신을 완벽하게 속이고 견고한 믿음 속에서 나를 속이려는 사람은 거짓인지 참인지를 밝혀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같은 배우가 같은 영화에 두 역할로 출연하는 영화를 보는 것처럼 이야기의 흐름을 눈을 버젓이 뜨고도 제대로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자기기만에 극도로, 병적으로 능한 사람은 마음에서 양심, 도덕, 이상을 관장하는 초자아 기능에 매이지 않습니다. 너무나 자유로워서 보고 싶은 것, 듣고 싶은 것, 알고 싶은 것, 말하고 싶은 것만 선택하고 남들의 생각, 감정, 의견에 무감각합니다. 자기기만 전문가(?)에게도 결국 뉘우침이 남을까요? 비관적입니다! 혹시 만에 하나 제 예측이 틀린다면, 저는 전략적으로 저의 무지함과 무능함을 주장하며 빠져나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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