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은 개별적이지만 밥상은 공동체 문화를 응축한 축소판이다. 맛의 문화적 정보는 사회마다 다른데 같은 사회 내에서도 연령층에 따라 차이를 드러내기도 한다. 며칠 전 청어조림이 구내식당 메뉴였다. 예상대로 식당은 한산했다. 오전에 같은 부서 직원들이 모여서 점심 메뉴를 놓고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청어가 멸치처럼 작은 물고기인가?/무슨 소리야 고등어만큼 큰 물고기야/가시 많고 비린내 나는 생선은 질색인데 밖에 나가서 먹자”라는 대화였다. 다른 부서 젊은 직원들도 같은 마음이었는지 구내식당은 중년 직원들만 가득했다.
유소년 시절 섬에서 생활할 때 청어나 전어를 굽는 날이면 할머니는 가시 많은 생선이 맛있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되뇌곤 했다. 청어는 조선 백성들이 좋아하던 생선이었다. 세종 19년(1437년 5월 1일), 호조(戶曹)는 경상, 전라, 충청, 황해도 백성이 앞다투어 청어를 잡아 큰 이득을 얻는데 방치하면 백성들이 농사를 포기하고 바다로 나갈지도 모른다고 상소했다. 청어는 명태, 조기 못지않은 주요 수산물이었음에도 농사를 국가 운영 기반으로 삼았던 관리들 인식을 엿볼 수 있다.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가덕도에 성 쌓는 일을 책임졌던 방호의는 중종 39년(1544년) 임금께 청어잡이에 대해 보고했다. “웅천·김해·양산·밀양의 허다한 백성이 이익을 좇아 날마다 고깃배 수백 척이 청어를 잡는데, 지금도 우도의 갯가 각 고을의 어선이 바다를 덮고 밤낮으로 잡습니다. 전에 왜구가 틈을 타서 죽이고 약탈한 것이 수없이 많았습니다. 백성들은 이익을 탐내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왜구 막는 일에 허술함이 없어야 합니다.”
잔가시가 많은 물고기로 준치를 빼놓을 수 없다. 시인 백석은 ‘준치가시’에서 “준치는 옛날엔 가시 없던 고기/준치는 가시가 부러웠네/(중략)/고기들은 준치를 반겨 맞으며/준치가 달라는 가시 주었네/(중략)가시 없던 준치는 가시가 많아져/기쁜 마음 못 이겨 떠나려 했네/(중략)/준치를 먹을 때엔 나물지(나무라다의 평북 방언) 말자/크고 작은 물고기의 아름다운 마음인/준치 가시를 나물지 말자”라고 했다. 시로 읊을 만큼 준치 가시는 명성이 자자했으나, 생선 중에서 가장 맛있다고 하여 진어(眞魚)라고도 했다.
박완서는 소설 ‘그 남자네 집’ 중에서 준치 가시가 많아진 사연을 재밌는 일화로 소개했다. “용왕님이 바다의 물고기를 만들려고 살하고 가시를 쌓아놓고 형형색색의 물고기를 만들고 나니 마지막으로 제일 맛있는 살이 남았는데 살에 비해 가시가 너무 많이 남았더란다. 그래서 용왕님은 에라 모르겠다. (중략) 그 맛있는 살에다가 남은 가시를 몽땅 집어넣어 만든 게 준치란다.” 요즘 사람들은 공감하기 어렵겠으나, 예전에는 잔가시가 아무리 많아도 최고로 맛있는 물고기로 쳤다. ‘썩어도 준치’라는 말이 왜 생겼겠는가. 잔가시 많기로 웅어도 뒤지지 않는다. 왕자들 교육을 맡은 윤선도에게 인조는 종종 웅어를 하사했다. 사옹원에 특별히 위어소(葦魚所)를 두어 한강에서 잡히는 웅어를 궁중에 바치게 할 정도로 귀하게 여긴 물고기였다. 가시 많은 생선이 맛있다는 옛사람들 말을 헤아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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