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선(茗禪·차를 마시며 참선에 들다) 초의(草衣)가 스스로 만든 차를 보내왔는데, 몽정차와 노아차에 덜하지 않다. 이 글을 써 보답하는데, 백석신군비의 뜻으로 쓴다. 병거사가 예서로 쓰다.’
―완당 김정희의 ‘명선’ 중에서
제주에 유배 중이던 완당 김정희(金正喜·1786∼1856) 선생이 당대의 선승(禪僧)이자 차(茶) 문화 선구자인 명선 초의선사(草衣禪師·1786∼1866)에게 고마움을 담아 적은 글이다. 초의와 완당은 평생의 벗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신분은 달랐지만 예술, 학문, 다도를 통해 깊은 우정을 나눴다. 이 글에 서로의 글씨와 차를 아끼고 사랑했던 두 사람의 마음이 그대로 묻어난다. ‘명선’은 완당의 50대 때 작품으로 그의 현전하는 가장 큰 글씨이자 가히 최고작이라 할 수 있다.
완당은 벗이 직접 만들어 보낸 차를 중국의 전설적 명차인 몽정과 노아에 빗대며 상찬한다. 급기야 차 한 모금이 자신을 참선의 경지로 이끌었다고 절절하게 고백한다.
이 작품을 처음 실견한 것은 1980년대 초중반의 어느 초여름, 당시 고등학생이던 나는 성북동 북단장 보화각 1층 전시실에서 저 글을 마주했다. 커다란 ‘명선’의 글씨는 물론이며, 양옆으로 적힌 내용은 내 마음의 불에 기름을 퍼붓는 것만 같았다.
벗이 선물한 차에 깊이 심취해 선의 경지를 바라본다니…. 그 마음이 멋스럽기 그지없어 보였다. 어린 마음에 나도 완당의 글씨를 흉내 냈다. 집에서 구독하던 동아일보의 날짜 지난 신문에 먹을 갈아 붓질을 하며 혼자 흐뭇해했던 것이다.
그때 ‘나의 초의선사’는 미술사학자인 수암 이원복 선생이었다. ‘명선’을 보도록 내 손을 이끈 그는 나의 가톨릭 대부이기도 하다. 완당의 마음으로 오늘은 차 대신 선생께 술병 하나 들고 찾아뵙고 싶다. 오랜 벗과 귀한 마음을 나누기에 이만한 계절이 또 있을까. 창밖을 보니 어느새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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