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섭의 단편소설 ‘사랑 손님과 어머니’를 구글과 네이버의 번역기에 각각 넣고 돌리면 구글은 ‘love guest and mother’로, 네이버 번역기 ‘파파고’는 ‘a loving guest and mother’로 번역한다.
어느 쪽이 좋은 번역인지 미국에 사는 지인에게 물어보니 “둘 다 썩 좋지는 않지만 파파고의 손을 들어주겠다”고 했다. ‘love guest’는 부적절한 관계를 연상시키지만 ‘loving guest’는 ‘사랑스러운’ 혹은 ‘사랑 많은 손님’을 생각하게 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파파고가 소설 내용을 반영해 의역을 내놓은 건 한국어 데이터를 더 많이 학습한 덕일 것이다. ‘언어 장벽(language barrier)’이 국내 시장에서 우월성을 보장하는 보호막인 셈이다.
문제는 실리콘밸리 인공지능(AI)의 성능이 하루가 다르게 향상돼 가는 마당에 언어 장벽이 언제까지 보호막이 되겠느냐는 점이다. 오픈AI가 GPT-3에 이어 석 달 만에 선보인 GPT-4는 대중 유행어까지 이해할 정도로 한국어 실력이 향상됐다. 언어 장벽이 허물어지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말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네이버, 카카오, LG, SK텔레콤 등 국내 회사들도 AI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지만 미국 테크기업 간 경쟁 속에서 한국의 입지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한 국내 기업 임원은 “자체 기술을 개발하는 동시에 오픈AI 기술도 사용하는 ‘투트랙(two-track)’ 전략이 당분간은 유효하겠으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시점이 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라고 털어놓았다. 오픈AI는 AI 비즈니스 플랫폼으로 진화하겠다는 비전도 발표했다. AI 생태계 전체를 독점하게 될 가능성도 높아 보인다.
승자독식 구도로 흐르기 쉬운 ‘디지털 경제’ 시대에 해외 업체에 선제골을 내주고 걱정에 휩싸인 국내 AI 업계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할까. 망연자실 해외 테크기업의 등을 바라보지만 말고 AI를 이용해 어떤 가치를 실현하려는 것인지 다시 돌이켜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미래의 사회와 사람은 어떤 경험을 필요로 할지, 미래 사회에서 추구할 가치 있는 일은 무엇이며 우리의 서비스가 그 가치를 구현하는 데 도움이 되려면 어떤 방식으로 작동해야 할지 고찰하는 일이다. 혹자는 “바쁜 사람 붙잡고 한가한 소리 하지 말라”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최근 고개를 들고 있는 AI 경계론은 폭주하는 AI 개발 경쟁에 근본적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외신에 따르면 지난달 말 AI 전문가와 석학 수백 명이 “통제불가한 AI 개발을 멈춰야 한다”는 성명에 사인했다. 이 성명은 AI가 초래할 수 있는 위험을 인류가 제어할 방법을 마련하기 위해 6개월간 AI 개발을 중단하자는 주장을 담고 있다. 딥러닝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요슈아 벤지오 몬트리올대 교수, 애플 공동창업자 스티브 워즈니악, 이스라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 등이 동참했다고 한다. 이탈리아 정부는 “챗GPT가 개인 정보를 불법 수집하고 있다”며 챗GPT 접속을 원천 차단했다.
막대한 돈과 이해 관계가 얽혀 있는 테크산업에서 이 같은 움직임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많은 사람이 주목하고 있다. 세찬 물결의 흐름을 막기엔 역부족이라고 할지라도 ‘혁신에서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는 말에 답이 있음을 되새기게 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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