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에 따라 의미가 결정되기도 한다. 리움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이탈리아 예술가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작품들이 그러하다. 그중에서도 특히 ‘어머니’와 ‘아버지’라는 작품이 그러하다.
하나는 모래에 묻힌 사람이 두 손만을 내놓고 기도하는 사진으로 ‘어머니’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사실 이것은 작가가 1999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펼친 행위예술을 촬영한 것이다. 당시 그는 인도의 이슬람 수피 수도자를 초청해 모래 속으로 들어가 두 시간 동안 손만 내놓고 기도하는 고행을 하게 했다. 그것은 어머니와 관련이 없는 수피교도의 고행이지만 작가는 거기에 ‘어머니’라는 제목을 붙였다. 다른 하나는 누워 있는 사람의 발바닥만 보이는 작품으로 ‘아버지’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흙이 묻은 발바닥은 아버지가 아니라 자신의 것이지만 작가는 거기에 ‘아버지’라는 제목을 붙였다.
우리는 제목에 맞춰 작품을 해석하게 된다. 제목의 지배를 받는다고 할까. 제목이 없다면 이 작품들을 보고 어머니와 아버지를 생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작가는 제목을 붙이고 손과 발을 보여주며 “관객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도록 강요한다”. 의미가 생성되는 방식을 갖고 일종의 포스트모던 유희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유희라 하더라도 작가는 그런 제목을 붙이면서 자신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떠올렸을지 모른다. 그가 스물두 살이었을 때 세상을 떠난 어머니는 청소부였고 아버지는 트럭 운전사였다. 그래서 하나는 신앙심이 깊은 가톨릭 신자였던 어머니를 위한 애도의 작품이고, 다른 하나는 막노동하며 살아야 했던 아버지를 위한 애도의 작품일 수 있다. 그렇다면 유희에 진지함이 섞여 있는 셈이다.
그것은 개인적인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유희적인 작품이 우리를 울컥하게 한다. 흙이 묻은 발바닥이 암시하고 환기하는 우리들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고단한 삶을 돌아보며, 사진 속의 손처럼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싶다. 제목이 부리는 마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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