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토요일 저녁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동생 김여정의 담화를 전하는 뉴스 속보가 떴다. ‘만우절이라선가?’라는 생각이 스칠 만큼 담화는 뜬금없었다. 김여정은 난데없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핵 망상’ 운운하며 맹비난했다. “젤렌스끼가 미국의 핵무기 반입이요, 자체 핵개발이요 하면서 떠들어대고….”
김여정이 ‘핵 망상’의 근거로 제시한 것은 우크라이나 대통령실 홈페이지에 오른 국민 청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벨라루스에 전술핵을 배치하겠다고 하자 그에 맞서 우크라이나도 미국 핵무기를 도입하거나 자체 핵무장을 하자는 내용이다. 대통령의 공식 답변이 나오려면 2만5000명이 청원에 동참해야 하는데, 고작 600명 남짓 참여한 상태였다.
그런 온라인 청원을 용케도 찾아내 러시아에 고자질이라도 하듯 주말에 담화까지 낸 선전선동 일꾼 김여정의 노력은 고약하고 잔망스럽다. 한데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듯한 만우절 객쩍은 소리로만 듣고 넘기기엔 기묘한 구석이 적지 않다.
그동안 우리 사회 내부에서 전술핵 재배치 여론이 일어도, 윤석열 대통령이 ‘자체 핵보유도 가능하다’고 밝혀도 반응을 보이지 않던 북한이다. 뭐라도 한마디 한다면 그게 제 얼굴에 침 뱉는 격임을 알아서였을까. 그렇게 켕겨서 못 했던 말을 김여정은 먼 나라 우크라이나를 향해 쏟아냈다. “미국을 하내비(할아비)처럼 섬기며 상전의 허약한 약속을 맹신하는 앞잡이들은 자멸적인 핵 망상에서 하루빨리 깨어나야 제 목숨을 지킬 수 있다.”
북한은 그 담화가 누구보다 푸틴의 귀에 들어가길 바랐을 것이다. 김여정은 1월 말 금요일 밤에도 우크라이나에 주력전차를 지원하겠다는 미국의 발표를 비난하면서 “우리는 로씨야 군대와 인민과 한 전호(참호)에 서 있을 것”이라는 담화를 낸 바 있다. 푸틴의 환심을 사기 위한 구애의 메시지였다.
이번 담화가 나오기 이틀 전 미국 정부는 러시아가 북한에 식량을 내주는 대신 무기를 지원받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며 그 거래를 주선한 슬로바키아인 무기상을 독자제재 명단에 올렸다. 작년 말에도 미국은 북한이 러시아 용병기업 바그너그룹에 무기를 팔았다며 그 정황을 보여주는 위성사진을 제시한 바 있다. 당시 북한은 “황당무계한 조작”이라며 발끈했지만, 이번 미국의 조치에 대해선 부인조차 하지 않았다.
1년을 넘긴 우크라이나 전쟁은 끝도 없이 병력과 장비, 탄약을 쏟아붓는 소모전이 됐고 당장 러시아군은 포탄 부족에 허덕이고 있다. 그런데도 푸틴은 최근 모스크바를 방문한 시진핑 중국 주석에게서 어떤 군사적 지원 약속도 얻어내지 못했다. ‘무제한 협력관계’라던 다짐이 무색하게도 중국의 선택은 신중했다. 실망한 러시아로선 꿩 대신 닭이라도 찾아야 할 참이다.
북한엔 더없는 기회가 아닐 수 없다. 미국과의 거래를 통해 핵을 상품화해 보려던 시도가 좌절된 이래 북한은 본격적인 핵·미사일 도발에 나섰다. 때마침 펼쳐진 신냉전 국면을 한껏 활용하며 한미일-북중러 대결 구도를 굳히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다. 더욱이 러시아와의 군사 협력은 식량난과 에너지난을 일거에 해결할 한 줄기 희망이다.
그렇다고 푸틴이 대놓고 북한 무기를 조달할 처지는 아니다. 당장 한국의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을 부르는 자충수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쟁이 장기화할수록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는 북-러의 거래는 시간문제일 것이다. 북한이 우크라이나 전장에 의용군을 투입할 것이라는 미확인 외신 보도도 그래서 심상찮다. 이러다 우크라이나에서 남북 간 간접 대결이 벌어지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북-러 밀착이 어디까지 갈지 면밀히 주시하고 대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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