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의 은행 순시가 3일 대구은행을 끝으로 일단락됐다. 이 원장은 2월 말 하나은행을 시작으로 6개 주요 시중·지방은행 점포를 직접 찾았다. 그때마다 각 은행은 금리 인하나 이자 면제 등 대규모 상생 대책을 발표하며 화답했다. 금감원은 이번 순회 방문 동안 은행들이 내놓은 금융지원책이 연간 3300억 원 규모의 이자 감면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구체적인 계산까지 내놨다.
이 원장은 은행의 주요 기능 중 하나를 사회공헌, 자신의 주된 책무는 이를 독려하는 것이라고 믿는 듯하다. 그는 얼마 전 “은행 수익의 3분의 1은 국민이나 금융 소비자를 위해 써야 한다”는 지론을 폈고, 은행의 사회공헌 내역을 일일이 평가하겠다는 계획도 밝힌 바 있다. 말로만 하는 게 모자랐다고 봤는지 이젠 몸소 은행들을 찾아다니며 압박하는 방법을 택했다. 금감원 측은 은행들이 자발적으로 상생 방안을 내놨다고 하지만 실상은 규제 당국의 강요 내지 압력으로 느꼈을 게 뻔하다.
고물가와 경제난에 시달리는 많은 국민은 이자 장사로 떼돈을 번 은행들을 쥐어짜는 금감원장의 행보에 박수를 칠 수도 있을 것이다. 부잣집 곳간을 털어 서민들에게 나눠주는 의적(義賊)에 그를 비유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상생’을 내세워 금융사에 금리 인하와 사회 환원을 강요하는 것이 과연 금융당국 수장으로서 적절한 직무 행위였는지는 의문이 남는다. 금감원장의 가장 큰 임무는 적절한 규제·감독으로 금융 부문 리스크가 커지는 것을 막고 금융회사의 건전성을 관리하는 일이다. 그런데 금감원장의 은행 팔 비틀기는 시장의 금리 체계를 망가뜨리고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을 무력화할 개연성이 크다. 또 은행에 초과 이익의 환수를 강요함으로써 미래의 부실에 대비한 기초 체력을 저하시킨다는 지적도 받는다.
지난해 취임 이후 이 원장의 행보나 화법은 통상적인 관료 출신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은행의 과도한 이자마진에 문제가 있다면 보통 같으면 은행의 담당 임원들을 불러다 조용히 얘기하지, 이 원장처럼 공개석상에서 “약탈적 영업”이라고 핏대를 세우진 않는다.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 금융지주 회장을 자리에서 끌어내릴 때도 세상 다 들으라는 듯 상대에게 비수를 꽂았다. 또 어느 자리건 늘 기자들을 몰고 다니며 당국 간에 조율되지 않은 본인의 메시지를 서슴없이 쏟아낸다. 이 원장은 최근 주변에 내년 총선 출마 계획이 없다는 얘기를 반복해서 한다는데, 실상은 이와 다르게 노골적인 정치 행보를 하고 있다는 평가가 많다.
금융권 인사들은 뚜렷한 법적 근거가 없는 당국의 지시나 간섭을 “가장 고약한 관치”라고 말한다. 은행의 성과급 잔치나 CEO ‘셀프 연임’ 같은 모럴 해저드를 막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런 작업도 당국자의 즉흥적 발언이나 정치성 이벤트가 아닌 기존에 정해진 제도, 시스템을 따라 진행돼야 한다. 우리 은행들이 국내에서만 사상 최대 이익을 내고 정작 글로벌 무대에선 경쟁력을 상실하고 빌빌거리는 데는 찍어내기식 인사 개입과 비공식 창구 지도에 익숙한 당국의 책임도 적지 않다. 그동안 많은 논란을 불러온 금감원장의 금융회사 순시는 이제 이쯤에서 끝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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