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기독교 문명권에서 부활절은 가장 중요한 절기이다. 작년 교황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당사자들에게 부활절 휴전을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 종교도 전쟁을 이기지는 못하나 보다.
1916년 4월 24일 1000여 명의 아일랜드 무장 독립투쟁군이 봉기해서 더블린 시내의 주요 거점들을 점거한다. 이를 부활절 봉기라고 부른다. 아일랜드는 오랫동안 영국의 지배를 받아왔고, 그만큼 끈질기게 저항했다. 1912년에 영국 의회는 아일랜드 자치법을 비준했다. 하지만 곧이어 발발한 1차 세계대전으로 자치 실행이 연기되었다.
이것도 불만이지만 자치 자체에도 불만인 세력이 꽤 있었다. 그들은 자치가 아니라 즉각적인 독립을 원했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이 치열해지자 영국은 부족한 병력을 충당하기 위해 아일랜드인을 징병하려고 했다. 이것도 아일랜드인의 불만에 불을 지폈다. 여기저기서 결성되었던 무장단체나 독립운동 단체들은 이런 불만을 이용해 무장봉기를 기획한다. 마침 독일과도 연결이 되어서 무기 지원 약속을 받아낸다.
봉기는 초반에는 성공적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의외로 시민들의 반응은 뜨겁지 않았다. 독일이 보낸 무기는 중간에 영국 해군에게 적발되어 전달되지도 않았다. 영국은 즉시 군대를 동원해 반군 진압을 시작했다. 4월 30일 지도부는 거점이던 중앙우체국에서 무고한 시민의 희생을 막겠다는 이유로 영국군에게 항복한다.
봉기는 참담한 실패로 끝났지만, 영국은 언제나처럼 아일랜드에 가혹했다. 무고한 시민들을 잡아 가두고, 반란 주동자들을 서둘러 총살해 버렸다. 영국의 과잉 진압으로 부활절 봉기는 정말로 항복한 아일랜드인의 투쟁 정신을 부활시켜 버렸다. 1980년대 거의 90년대까지도 테러집단의 대명사였던 IRA가 바로 이 사건을 계기로 탄생하게 된다. IRA가 다 극렬단체였던 것은 아니지만 그 이후에도 북아일랜드 독립 문제, 영국군의 과잉 진압이 반복되면서 일부가 과격화됐다.
피는 피를 낳고 악은 더 큰 악을 생산한다. 우리는 정의로운 세상을 꿈꾸지만, 정의는 피 묻은 돗자리에서만 피어난다는 말도 있다. 정말 부활해야 할 것은 순백의 정의이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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