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헤어지는 법[서광원의 자연과 삶]〈70〉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4월 13일 03시 00분


서광원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장
서광원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장
얼마 전, 저녁 산책을 하다 꽃구경을 나온 엄마와 아이의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됐다. 눈송이처럼 흩날리는 벛꽃을 보며 팔짝팔짝 뛰던 아이가 말했다.

“와∼. 엄마, 다음 주에 또 오자.” “글쎄. 이 꽃잎들이 떨어지면 더 이상 꽃이 없어.” “진짜? 엄마, 그럼 꽃잎한테 떨어지지 말라고 해. 응?” “정말? 근데 꽃잎이 떨어지고 잎이 나야 열매를 맺지. 네가 좋아하는 사과, 오렌지 같은 과일이 다 꽃이 져야 만들어지는 거야.” “그래? 음∼, 그럼 빨리 지라고 해.”

아이가 무안할까 싶어 혼자 씩 웃으며 지나쳤는데 두 사람의 말이 계속 따라왔다. 꽃이 져야 열매를 맺는다는 말도 그랬지만, 더 좋은 게 나타나면 아름다운 꽃잎도 찬밥 취급을 받는구나 싶은 아이의 말이 혼자 웃음 짓게 했다. 그런데 사실 꽃이나 꽃잎만큼 아름다운 게 또 있다. 헤어지는 과정이다.

봄이 가는 것을 알리는, 꽃잎이 떨어져 나간 자리를 보면 의외로 매끈하다. 한 몸으로 붙어 있던지라 생채기 같은 게 있을 법도 한데 그런 게 없다. 남아 있는 약간의 흔적도 곧 사라진다. 일반 잎 역시 마찬가지인데,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헤어짐이란 언제든 쉬운 일이 아닌데.

비결이 있다. 이들은 ‘잘 헤어지는 법’을 안다. 꽃이 피고 어느 시점이 되면 꽃잎과 꽃의 경계에 있는 세포들이 일을 시작한다. 잠에서 깨어 두세 배 정도 커지면서 세포벽을 분해하는 효소를 만든다. 식물은 단단한 세포벽으로 세포를 보호하는데, 이 ‘벽’을 허무는 ‘일꾼’을 만드는 것이다. 묘한 건, 떨어져 나가는 바깥쪽 세포(이탈 세포)들은 이 효소를 밖으로 배출하지만, 남아 있을 안쪽 세포(잔존 세포)들은 그러지 않는다는 것이다. 떠나야 할 세포와 남아야 할 세포가 어떻게 정해지는지, 아니면 스스로 그렇게 하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 과정에서 세포벽을 이루는 리그닌이 하는 역할이 재미있다.

벌집처럼 육각형 모양을 하고 있는 리그닌은 일종의 접착제처럼 기능해 세포벽을 단단하게 만들어서 초식동물들이 먹어도 소화를 못 시키게끔 하는데, 이 리그닌이 ‘일꾼’ 효소들을 울타리처럼 둘러싼다. ‘여기만 자르라’는 듯 말이다. 그 덕분에 가위 기능을 하는 효소들이 다른 곳이 아닌, 잘라야 할 곳을 정확하게 자른다. 한 몸이었던 ‘관계’가 이렇듯 상처 없이 매끈하게 마무리되기에 지는 꽃잎은 깔끔하게 떠날 수 있고, 남은 쪽은 외부 병원균 등의 침입으로부터 안전하다. 헤어짐 역시 꽃처럼 아름다운 이 이별법은 곽준명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교수와 이유리 서울대 교수가 몇 년 전 규명한 것이다.

우리도 이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개인이건, 기업이건, 한 몸처럼, 또 꽃처럼 어울리다 서로에게 상처 주며 거칠게 찢어지는 일이 허다하지 않은가. 자연의 지혜는 참 무궁무진하다.

#잘 헤어지는 법#꽃구경#서광원의 자연과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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