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강가 정자에 나와 햇살 속을 뒹구는 시인. 강물은 바삐 흐르지만 내 마음은 유유히 하늘에 뜬 구름처럼 느긋하다. 봄이 무르익으면서 초목은 한결 무성해지고 만물은 바야흐로 풍요를 구가한다. 한데 가만히 저물어가는 봄날을 바라보는 시인은 ‘만물이 저 홀로 활기찬’ 것이 영 못마땅하다. 굴곡진 삶의 돌파구가 좀체 보이지 않아서다. 비록 지금은 지인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초당을 마련하고 가족이 한데 모여 살지만 이게 결코 내 삶의 궁극적 지향은 아니지 않은가. ‘내 언젠가 저 정상에 올라 뭇 산들이 얼마나 작은지 한 번 굽어보리라’(‘태산을 바라보며’) 했던 호연지기에 비하면 현실은 왜 이토록 초라하고 절망적인가. 수년이 지나도록 안사의 난은 끝날 기미조차 없고 가난에 찌든 떠돌이 생활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흐르는 강물처럼 앞을 향해 내달릴 마음이 없다는 건 무욕의 달관이 아니라 무기력한 체념이다. 구름처럼 느릿하게 머물고만 있다는 건 세파에 시달린 상흔에 지쳤음을 자인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생기발랄 활기찬 만물’은 결국 시인과 세상 사이의 모순이요, 갈등이다. 무엇으로 아픔을 달래나. 그나마 시가 유일한 위안이겠는데 시인에게 시는 유유자적에서 술술 흘러나오는 노래가 결코 아니다. ‘시름 잊고자’ 다듬고 다듬어 ‘억지로 지어낸 것’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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