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람이라면 모두 아는 신라의 대표적인 유물인 천마도는 올해로 발굴 50주년을 맞이했다. 천마도는 수학여행의 추억과 국제적인 역사도시인 경주를 대표하는 유물 이상의 의미이다. 하늘을 날아오르는 천마처럼 1500년 전 유라시아 대륙과 맞닿으며 거대한 국가로 웅비하려는 신라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담고 있기 때문이다. 가히 ‘천마도 코드’라고 해도 될 정도의 천마도 안에는 수많은 비밀이 숨겨져 있다. 지난 50년간 한국과 유라시아의 숨은 관계를 상징하는 한국의 대표적인 유물로 자리매김한 천마의 기원을 살펴보자.》
남한에 없어 수입한 자작나무
천마총의 원래 이름은 경주 고분 155호분이었다. 관광자원 개발을 위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로 선택된 155호분은 8개월에 걸친 조사를 통해 경주를 대표하는 고분 ‘천마총’으로 다시 태어났다. 바로 그 안에서 발견된 ‘천마도’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고분의 주인공을 알면 ‘능’이라 붙이고 모르면 ‘총’이라 붙인다. 이렇게 주인공을 모르는 상황에서 대표적인 유물로 그 고분의 이름을 붙이는 것은 일제강점기부터 생겨난 관습이다. ‘금관총’ ‘금령총’ ‘서봉총’ 등이 그렇다. 물론, 이런 명명법은 신라 왕족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니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다. 155호분은 일제강점기 이후로 최초로 발굴된 대형 왕족 고분이라 ‘천마총’이라 붙여졌지만 그 이후에 발굴된 98호분은 그냥 ‘황남동의 큰 고분’이라는 뜻의 황남대총으로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하튼 무덤의 이름을 결정할 정도로 천마도의 느낌은 강렬하다. 신령한 말이 구름 사이를 헤엄치는 듯하여 보는 것만으로도 신비한 느낌이 든다. 천마도는 가로 75㎝, 세로 56㎝, 두께 0.6㎝ 크기의 자작나무 껍질을 앞뒤로 덧대어 만든 말다래(障泥)를 말한다. 말다래는 달리는 말의 발굽에 차인 진흙이 기마인의 다리에 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왕족이 말을 타고 행렬을 인도하면 그 양옆을 장식하는 화려한 장식이니 단순한 실용성을 넘어 가장 화려한 상징이다.
천마도의 첫 번째 코드는 바로 그 재료인 자작나무다. 하얀 나무껍질로 유명한 자작나무는 시베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북방 유라시아의 대표적인 나무다. 필자도 시베리아에서 발굴할 때에 자작나무와 함께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풍부하다. 그 껍질은 불이 잘 붙어서 불을 땔 때에 필수고, 또 벗겨내서 바구니 같은 생필품을 만든다. 봄에는 자작나무에서 달달한 수액을 뽑아서 먹곤 한다.
그런데 천마총의 자작나무는 특별하다. 넓이 70㎝ 정도의 크고 질 좋은 자작나무 껍질을 이용한 것이다. 자작나무의 껍질은 벗기면 곧 마르기 때문에 벗기자마자 세심하게 다듬고 도화지처럼 펼쳐 놓아야 한다. 여기에 천마 같은 예술을 그리려면 자작나무의 가공과 예술법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남한에서는 자작나무가 자라지 않는다. 머나먼 시베리아 북방에서 자작나무를 구해 껍질을 벗겨 가공한 것을 신라로 수입해야 한다. 천마도뿐 아니라 금관 밑에 덧쓰는 모자의 재료로도 자작나무가 사용되었으니, 신라가 지속적으로 북방의 여러 지역과 교역을 해야 한다. 언제나 북방지역과 맞닿으며 나아가려 했던 신라의 귀족들에게 자작나무는 단순한 나무 그 이상의 의미였을 것이다.
‘왕을 하늘로 모셔간다’는 천마
천마도의 두 번째 코드는 머리에 달린 뿔이다. 이마에 뿔이 달리고 날개가 달린 유니콘 같은 모습은 유라시아 전역에 널리 퍼진 상상의 동물이다. 그런데 그런 모습은 그냥 상상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사실 말 머리의 이마를 장식하는 풍습은 말과 함께 평생을 보내는 유라시아의 기마민족 사이에 널리 보인다. 한때 천마가 아니라 중국 신화의 동물인 기린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하지만 북방을 대표하는 자작나무로 만든 마구에 중국 신화의 동물을 그린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잘 납득이 되지 않는다. 기린은 상상의 동물로 형태도 각양각색이지만, 대체로 사슴과 비슷하다. 게다가 고구려의 벽화에도 뿔 달린 말을 ‘천마’라고 쓴 것이 또렷이 남아 있다. 사실 기린설은 한국에서 다소 이질적인 것이 나오면 막연하게 중국에서 그 기원을 찾는 선입견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무덤에 천마를 함께 부장하는 풍습은 유목민의 오랜 전통이다. 알타이의 파지리크 문화(기원전 7세기∼2세기)에서 흉노와 튀르크(돌궐)에 이르기까지 전사들의 무덤 옆에는 화려하게 뿔을 장식한 말도 함께 부장했다. 특히 신라와 같은 시기에 존재했던 튀르크는 무덤을 만들면 그 안의 나무 위에 말의 가죽을 걸쳐놓았다. 무덤의 주인공을 하늘로 인도하는 역할이다.
이렇듯 기마문화는 유라시아 초원에서 발달해서 한국과 중국 일대로 널리 퍼졌고 신라에서 화려하게 완성되었다. 초원의 여러 문화를 숭앙하고 기마문화가 발달했던 당시 신라에는 이런 말 그림뿐 아니라 지금도 수많은 기마인들 사이에 남아 있는 것과 비슷한 말과 관련된 풍습이나 신화도 함께 내려왔을 것이다.
천마도의 세 번째 코드는 천마도 말의 발에 있다. 천마도의 말은 왼쪽의 앞발과 뒷발이 모두 뒤쪽을 향한다. 자연적인 걸음은 이렇게 나올 수 없다. 바로 한쪽의 앞발과 뒷발을 동시에 내딛는 측대보(側對步)법이다. 이런 걷기법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말이 어릴 때부터 조련을 해야 한다. 측대보로 걸으면 속도는 느리지만 승마자는 흔들림 없이 편하게 탈 수 있다. 그래서 전쟁 중에 말 위에서 화살을 쏘거나 귀한 왕족이 퍼레이드를 할 때 많이 쓰인다. 이렇게 측대보로 달리는 모습은 유목민인 흉노가 도입해 널리 퍼뜨린 유물에 남아 있다. 그리고 흉노의 영향을 받은 선비와 부여, 나아가 고구려 벽화에서도 보인다. 천마도의 말이 측대보로 걷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신라의 왕을 천천히 흔들리지 않고 편하게 하늘로 모셔간다는 뜻이었다.
왕권 강화 위해 북방지역 연계 강조
왜 신라인들은 북방의 천마신화와 수많은 유물을 받아들였을까. 그 배경에는 서기 4세기 중반 신라의 상황과 관련이 있다. 당시 신라는 박-석-김 등 세 성씨가 교대로 왕을 하다가 김씨가 독점을 하여 왕권을 강화하던 때였다. 왕위를 독점한 김씨를 중심으로 한 왕과 귀족들은 자신들만의 선민의식을 강화하며 북방지역과의 관련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경주에 초원 지역의 쿠르간을 모방한 적석목곽분을 만들고 다양한 의식에서 금관이나 유리그릇 같은 북방지역과 관련이 있는 것을 썼다. 쉽게 구하기 어려운 자작나무에 화려한 예술을 결합한 천마도는 이러한 신라 왕족의 선민의식의 정점에 서 있는 것이다.
천마 같은 초원의 유물을 묻는 풍습은 200년간 비교적 짧은 시간에 존속했고 서기 6세기경에 홀연히 사라졌다. 삼국 통일의 과정에서 불교가 도입되고 새로운 무덤이 만들어지면서 화려한 유물을 묻는 전통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신라는 무덤에 넣는 화려한 유물 대신에 군사력을 경쟁적으로 증강하며 부국강병에 힘써야 했다. 하지만 문무왕은 물론이고 다른 김씨의 여러 비문에도 자신들을 흉노의 후예라고 쓴 구절이 등장한다. 삼국을 통일한 직후에도 여전히 자신들의 선민의식을 북방에서 찾으며 흉노의 후예로 자처하곤 했기 때문이다. 삼국이 통일된 이후에도 천마의 의미는 사라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유라시아 각지의 다양한 자료가 알려지고 보존 기술이 발달하며 천마도의 숨겨진 비밀들이 하나씩 밝혀지고 있다. 발굴된 지 50년이 지났지만 ‘천마도 코드’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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