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우에다 가즈오(植田和男) 일본은행 총재가 취임하면서 무제한 돈 풀기로 일본 경제를 장기 침체에서 구해내겠다는 ‘아베노믹스’의 주역들이 사실상 모두 퇴장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일본 총리의 경제 비전인 아베노믹스 10년의 공과에 대한 평가도 본격화하고 있다.
끝물 분위기인 ‘아베노믹스’는 10년 전엔 초유의 금융 실험이자 정치적 모험이었다. 2012년 12월 일본 중의원 총선에서 자민당은 ‘물가 목표 달성을 위해 대담한 금융완화를 하겠다’는 공약을 내걸고 승리했다. 경기 침체에 지친 민심을 등에 업은 아베 총리는 “윤전기를 쌩쌩 돌려 돈을 찍어내겠다”고 큰소리를 치며 일본은행을 압박해 2013년 1월 ‘디플레이션 탈출과 지속적 경제 성장 실현을 위한 정책협력’이라는 공동성명을 이끌어냈다. 일본 정부와 중앙은행의 정치적 타협이었고, 아베노믹스의 서막이었다.
공동성명의 당사자였던 시라카와 마사아키(白川方明) 전 일본은행 총재는 올해 1월 일본 경제전문지 ‘동양경제’ 기고문에서 “10년 전 일본 사회는 ‘2% 물가목표’나 ‘과감한 금융완화 요구’가 휩쓸었다”며 “1980년대 후반 거품경제나 1990년대 초반 금융위기 전야 때처럼 다른 의견을 허용하지 않는 시대 분위기가 지배했다”고 전했다. 돈을 풀어 물가를 끌어올리고 경기를 살린다는 아베노믹스 처방에 매료된 정치와 여론은 세계화나 정보기술(IT) 발달, 임금 하락, 인구구조 변화 등 금융 외적인 문제를 지적하는 목소리나 저출산 고령화 같은 근본 대책을 요구하는 주장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했다.
집단 사고와 정치적 타협은 후유증을 남긴다. 10년간 돈 풀기에도 일본 경제가 2% 이상 성장한 건 2번뿐이다. 물가도 최근 세계적 인플레와 다른 나라 금리 상승으로 엔화 가치가 하락하기 전까지는 기대만큼 반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미래 세대에 전가될 청구서는 두툼해졌다. 일반 정부부채 비율은 2012년 말 226%에서 2021년 말 262%로 뛰었다. 경제의 기초체력은 여전히 부실하다. 일본의 잠재 성장률은 0.7%에 그쳤다. 시라카와 전 총재는 “일본 경제의 당면 과제는 잠재성장률 저하를 막고 생산성을 끌어올리는 것”이라며 “일본은 이를 배우기 위해 20년 이상 꽤 오랜 시간을 썼다. 민주주의의 비용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너무 큰 비용”이라고 아쉬워했다.
경기 침체 위험에 직면한 한국 경제 앞에도 내년 4월 총선이라는 정치적 변수가 도사리고 있다. 여야가 사회간접자본(SOC) 투자의 문턱을 낮추는 예비타당성조사 면제 기준 완화에 합심하면서도 ‘돈 풀기’를 막는 보루인 재정준칙 법제화를 30개월째 미루고 있다는 건 ‘선거의 계절’이 다가오고 있다는 신호다. 추가경정예산(추경) 편성 등 미래 세대가 쓸 돈을 가불해 표를 얻으려는 정치권의 ‘표퓰리즘’ 요구도 더 거세질 것이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여론의 기적이 필요하다”며 재정준칙 법제화를 뭉개고 있는 여야의 ‘포퓰리즘 협치’를 막아달라고 하소연했지만, 그 역시 내년 총선 출마가 점쳐진다.
시라카와 전 총재는 “잠재성장률을 끌어올리는 데 필요한 근본 대책은 고통을 수반해 인기가 없는 데다 효과를 실감하기에 오랜 시간이 걸려 많은 사람들로부터 환영받는 금융완화가 선택된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미래를 생각하면 사회가 장기적으로 금융완화에 의존하는 것을 방지하는 메커니즘 구축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일본만의 고민은 아니다. 미래 세대에 부담을 떠넘기는 선거철 ‘민주주의 비용’을 최소화하려면 정말로 ‘여론의 기적’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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