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백발의 노인이 하프를 연주하고 있다. 머리와 수염은 하얗게 세고 이마와 손에는 세월의 주름이 깊게 새겨졌지만, 왠지 품격이 느껴진다. 세상만사 초월한 듯, 먼 데를 응시하며 연주에 몰입한 이 노인은 누구고, 그는 왜 어둠 속에서 홀로 하프를 켜고 있는 걸까?
이 그림은 페테르 파울 루벤스가 그린 ‘하프를 켜는 다윗 왕’(1616년·사진)이다. 성서에 나오는 다윗은 원래 양치기였다. 악기 연주 실력이 뛰어나 사울 왕의 악사로 궁에 발을 디뎠다. 그러다 팔레스타인의 거인 장수 골리앗을 돌멩이 하나로 쓰러뜨리면서 이스라엘을 구한 영웅으로 떠올랐다.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사울에 이어 이스라엘 제2대 왕이 된 후 40년간 통치하며 왕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파란만장했던 다윗의 이야기는 미술의 인기 주제였고, 대부분의 화가들은 젊고 매력적인 외모의 다윗이 승리하는 장면을 묘사했다. 한데 플랑드르의 화가 루벤스는 달랐다. 매력적인 청년도, 힘 있는 권력자도 아닌, 그저 홀로 연주에 몰입 중인 늙은 악사로 그렸다. 왕관도 없는 걸로 봐선, 아들 솔로몬에게 왕위를 넘기고 죽음을 앞둔 무렵일 것이다.
다윗은 신앙심이 두터운 왕이었지만, 무결한 인간은 아니었다. 충직한 신하의 아내 밧세바를 범한 후, 그녀를 얻기 위해 계략을 꾸며 충신을 죽게 했다. 그 죄로 어린 아들을 잃었고, 왕자들의 반란과 죽음을 지켜보는 등 시련을 겪어야 했다. 40년 권력의 무게를 내려놓은 칠순의 노인은 평화롭게 하프를 켜며 신을 찬양하는 중이다. 어쩌면 자신이 연주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음악을 신께 바치며, 지난 과오를 성찰하고 회개하는 중일 터다.
당시 루벤스는 안트베르펜에서 가장 성공한 화가로, 귀족적인 삶을 누리고 있었다. 신앙심 깊었던 그는 노년의 다윗을 그리며 스스로 되새겼을지도 모른다. 부와 명성은 영원할 수 없는 것, 결국 우리를 구원하는 건 참회와 아름다운 예술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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