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지원 가능성을 시사한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어제 “상식적이고 원론적인 대답”이라면서도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할지는 향후 러시아의 행동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우리 국내법이나 외교부 훈령에 교전국이나 제3국에 군사 지원을 금지하는 조항이 없다고도 했다. 러시아 측이 강력히 반발하고 있지만 ‘살상무기 지원은 없다’는 정부 방침의 향후 변화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다.
대통령실 측 설명대로 윤 대통령 발언은 상식적이고 원론적인 게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 대외관계에 큰 영향을 미칠 민감한 사안에 대해 그런 발언을 굳이 했어야 했는지 아쉬움이 남는다. 윤 대통령이 ‘대규모 민간인 공격이나 대량학살, 중대한 전쟁법 위반이 발생하면’이란 가정형 표현을 사용했다지만 대통령의 발언이 갖는 무게를 생각했다면 원론적 발언이라도 신중했어야 한다.
윤 대통령이 그 발언이 부를 파장을 인식하지 못하고 말했을 것 같지는 않다. 대통령실이나 정부 관계자들도 “계획 없이 나온 발언이 아니다”고 강조한다. 다만 그 파장의 수위나 향후 미칠 여파를 가볍게 본 것은 아닌지 의문이다. 당장 러시아는 “적대행위로 간주하겠다”며 반발했다. 특히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국가안보회의 부의장은 “러시아의 최신 무기가 북한 손에 있는 것을 볼 때 뭐라고 할지 궁금하다”며 대북 군사 지원 대응 카드까지 내비쳤다.
그간 정부는 러시아에 진출한 우리 기업과 교민의 안전, 나아가 북한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을 고려해 우크라이나에 인도적 재정적 지원을 하면서도 살상무기 지원은 거부해 왔다. 이 때문에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로부터 만만찮은 압력을 받았고, 이에 러시아는 한국을 향해 “관계 파탄”을 경고하기도 했다. 그래서 고육지책으로 미국과 155mm 포탄의 수출 또는 대여 계약을 맺어 미국의 빈 무기고를 채워 주는 ‘우회 지원’ 방식까지 동원했다.
그랬던 정부가 직접 지원 가능성을 열어둔 것은 내주 윤 대통령의 미국 방문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한미 정상회담에서 우크라이나 문제는 피하기 어려운 의제일 것이다. 북핵에 맞선 확장억제 강화를 위해 우리의 기여를 보여줄 필요도 있다. 그렇다고 직접 전쟁에까지 끼어들어 한-러 관계를 위험에 빠뜨려야 하는지는 냉철히 판단해야 한다. 국제적 보편 가치도, 동맹으로서의 기여도 중요하지만 우리 교민과 기업의 안전을 최우선에 두고 신중하고 정교하게 움직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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