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미주리주 캔자스시티 외곽에 사는 앤드루 레스터(84)는 초인종 소리에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날 밤 오기로 한 손님은 없었다. 부인이 요양원에 간 뒤 혼자 살아온 그에겐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의 집 현관문은 미국식 주택이 그렇듯 안쪽 문과 바깥문이 겹겹이 있는 이중 구조였다. 레스터는 안쪽 문을 열었다. 바깥문 유리창 너머로 낯선 흑인이 보였다.
레스터는 손에 쥔 리볼버 권총을 들어 올렸다. 그가 방아쇠를 당기기까지 몇 초간 둘 사이에 대화는 없었다. 총알은 유리창을 뚫고 나가 흑인의 이마를 스치듯 맞혔다. 레스터는 쓰러져 있는 그의 팔에 한 발을 더 쐈다. “당장 여기서 꺼져.”
몇 분 뒤 인근 주민 잭 도벨은 누군가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놀라 911에 신고했다. 911 요원은 “탈주범일 수 있으니 집에 있으라”고 했지만 창문 밖을 본 도벨은 나가볼 수밖에 없었다. 흑인 소년이 피를 흘리며 기도하듯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랠프 얄(16)이었다. 부모 심부름으로 친구 집에 놀러 간 쌍둥이 동생들을 데리러 나선 길이었다. 주소지 ‘115번 테라스(115th Terrace)’를 찾다가 한 블록 옆인 ‘115번 스트리트(115th Street)’로 가고 말았다. 유리창을 뚫고 나온 총알은 백인 노인이 사는 집 초인종을 잘못 누른 대가였다. #. 토요일(15일) 오후 9시 55분
여대생 케일린 길리스(20)는 친구 3명과 차를 타고 뉴욕주 교외의 울창한 숲길을 지나고 있었다. 고교 동창 파티에 가는 길이었다. 외진 곳이라 인터넷 신호가 불안정해 스마트폰 내비게이션은 먹통이었다. 길섶에 ‘사유지’ 간판이 있었지만 가로등이라곤 없는 밤길이어서 잘 보이지 않았다. 한 친구가 “길을 잘못 든 것 같다”고 했다. 그때였다. 엽총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총탄이 차 유리창을 관통했다.
운전하던 친구는 황급히 차를 돌려 가속페달을 밟았다. 911에 신고하기 위해 통신 신호가 잡히는 곳까지 8km를 내달렸다. 위치를 파악하려 멈춰 섰을 때 조수석에 있던 길리스는 피를 흘리며 숨져 있었다. 총을 쏜 60대 남성은 16만 ㎡의 거대한 사유지를 소유한 건설업자였다. 그는 경찰에 “무단침입자를 쫓아낸 것”이라고 했다.
#. 화요일(18일) 0시 15분
텍사스주 오스틴의 고교 치어리더인 헤더 로스(18)는 나흘 뒤 치어리딩 대회를 앞두고 친구들과 연습을 하고 돌아가던 길이었다. 슈퍼마켓 주차장에 차를 대고 음료를 사서 친구들이 탄 차를 찾아가다가 실수로 같은 차종의 다른 차에 타고 말았다. 로스는 낯선 남성이 타 있는 걸 보고는 재빨리 내려 친구들 차로 옮겨 탔다.
로스는 방금 전 잘못 탔던 차에서 20대 남성이 내려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사과를 하려고 차창을 내리는데 남자가 열린 창틈으로 총을 쏘기 시작했다. 로스가 한 발을 맞았고 옆에 있던 친구는 등과 다리에 맞아 치명상을 입었다.
미국의 총기 사고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일상의 흔한 실수가 연이어 총격 사건으로 번지자 미국인들도 충격에 빠졌다. ‘치어리더 사건’ 몇 시간 뒤 노스캐롤라이나에선 공놀이를 하다 다른 집 마당으로 공이 굴러가자 부모와 함께 주우러 간 6세 여아를 향해 집주인이 총을 쐈다. 부모 둘 다 중상을 입었다.
어떻게 이런 일로 사람에게 총을 쏘는 것일까. 미국에는 ‘캐슬 독트린(Castle Doctrine)’이란 관습법이 있다. 집은 주인의 성(城)이며, 성 안에 침입자가 있으면 무력으로 스스로를 보호할 권리가 있다고 본다. 이 관습법에 따르면 무력이 반드시 최후의 방어수단일 필요는 없다. 생명에 위협을 느낄 정도로 ‘합리적인 두려움’이 들었다면 정당방위로 인정된다.
이 같은 자위권을 집뿐 아니라 차량 등 개인 소유 공간으로 확장한 것이 ‘스탠드 유어 그라운드(Stand Your Ground·당신의 사유지에서 물러서지 말라)’ 법이다. ‘초인종 사건’이 발생한 미주리주 등 30여 개 주가 이 법을 두고 있다. ‘내 공간에선 쏴도 된다’는 인식이 싹틀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있는 것이다. 흑인 소년을 쐈던 레스터는 “당시 죽을 만큼 무서웠다”고 주장하고 있어 이 법의 보호를 받게 될 수도 있다.
미국의 총기 옹호론자들은 총은 총으로만 막을 수 있다는 ‘공포의 균형’을 강조한다. 하지만 누구나 총을 쏠 수 있다는 공포는 과도한 불안감을 부르고, 이는 과잉 대응으로 이어지며, 급기야 과잉 대응의 희생양이 될까 봐 더 불안해지는 악순환을 낳는다. 초인종을 잘못 누르거나 운전 중 길을 잘못 드는 사소한 실수에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 미국의 현주소는 총기로 꽁꽁 무장한 국가의 구멍을 여실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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