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달러 환율이 어제 장중 한때 1340.5원까지 치솟으면서 전날 기록한 올해 장중 최고점을 훌쩍 뛰어넘었다. 환율이 1340원을 넘은 건 5개월 만이다. 파산설이 제기됐던 미국 퍼스트리퍼블릭은행에서 예금이 많이 빠져나갔다는 소식에 달러화가 일시적 강세를 보이자 원화 가치가 심하게 요동쳤다. 외환위기, 신용카드 사태, 글로벌 금융위기 등 대형 경제위기 때마다 나타났던 ‘1300원대 환율’이 고착화될 조짐까지 보인다.
최근 원화 가치는 주요국 통화 가운데 유독 낙폭이 크다. 기준금리 인상이 조만간 끝날 것이란 전망에 ‘킹 달러’가 약화되는 추세인데도 그렇다. 지난 한 달간 원화보다 가치가 더 떨어진 화폐는 필리핀 페소, 아르헨티나 페소와 1년 넘게 전쟁 중인 러시아 루블 정도다.
‘나 홀로 원화 약세’의 원인 대부분이 우리 경제 내부에 있다는 게 더 큰 문제다. 무역의존도가 선진국 중 최상위권인 한국은 반도체, 대중(對中) 수출 위축으로 작년 3월부터 14개월째 무역수지 적자가 계속되고 있다. 한국은행은 수출로 벌어들이는 달러의 감소를 원화 가치 하락 원인의 40% 정도로 본다. 수출의 20%를 차지하던 반도체가 부진에 빠지면서 감춰져 있던 한국 경제의 약한 기초체력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게다가 미국 연방준비제도는 다음 달에 4.75∼5.0%인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더 올릴 전망이다. 경기침체와 가계부채 문제 때문에 3.5%에서 동결한 한국과 미국의 금리차가 사상 최대인 1.75%로 벌어지면 국내에 머물던 달러가 더 빠르게 빠져나갈 수 있다. 1위 교역국인 중국의 리오프닝 효과 지연으로 위안화가 약세인 것도 원화 가치 하락 원인 중 하나다.
큰 위기 때마다 고환율은 한국 수출품의 가격 경쟁력을 높여 경제 재도약의 발판이 됐다. 하지만 이번에는 과거의 위기 탈출 공식이 작동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농산물·에너지 수입 부담만 키운다. 식자재 가격과 전기·가스요금 인상으로 급등한 외식비, 내릴 줄 모르는 장바구니 물가는 한국인의 삶을 팍팍하게 만들고 있다.
게다가 중국에서 수입하는 희토류, 중동에서 사오는 원유 등의 높은 가격에 고환율이 겹쳐 기업들의 수출 경쟁력과 수익 구조는 악화되고 있다. 강도 높은 구조개혁과 미래산업에 대한 투자 확대로 경제 체질부터 확 바꾸지 않는다면 한국 경제는 펀더멘털 약화로 초래된 ‘고환율·고물가 함정’에서 탈출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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