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오전 11시 반경(현지 시간) 기자가 찾은 프랑스 파리 동역(東驛·Gare de l’Est) 정문 앞에서 강경파 노조로 꼽히는 노동총연맹(CGT) 관계자가 마이크에 대고 소리 높여 외쳤다. CGT 깃발을 들고 주변에 둘러선 노조원 100여 명이 환호로 화답했다. 이들은 “파업은 근로자 권리”라는 구호를 반복해 외치며 단합을 과시했다.
한 관계자가 “우리의 단합을 보여주기 위해 행진하자”고 독려하자 노조원들은 시끌벅적하게 줄을 지어 역 안으로 행진했다. 민중가요 ‘우리가 여기에 있다’를 박수에 맞춰 부르자 역 대합실을 오가는 시민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행렬 앞에 선 몇몇 노조원은 연기를 피우며 붉게 타는 조명탄을 흔들어 곳곳에 배치된 경찰들을 긴장시켰다.
CGT는 다음 달 1일 노조 총궐기에 앞서 이날을 ‘철도 분노의 날’로 명명하고 철도 노조 중심으로 파업에 나섰다. 연금개혁법이 15일 공포되자 노조는 더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법 공포됐지만 시위 계속돼
프랑스 연금개혁법은 정년을 62세에서 2030년까지 64세로 점진적으로 연장하고 연금을 100% 받기 위한 근무 기간을 42년에서 2027년까지 차차 43년으로 늘리는 내용이 핵심이다. 대신 일찍 일을 시작하는 사람은 빨리 퇴직할 수 있게 했다. 출산, 육아로 인한 경력 단절 탓에 연금을 받으려면 더 오랜 기간 일해야 하는 워킹맘에겐 최대 5% 연금 보너스를 지급하기로 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사실상 정치 생명을 걸고 연금개혁을 관철한 배경에는 고령화 등에 따른 연금 재정 적자 우려가 깔려 있다. 마크롱 대통령이 첫 임기를 시작한 2017년 약 1000만 명이던 연금 수급자는 지난해 1700만여 명으로 늘었고 2030년엔 2000만 명이 될 것으로 추산된다. 반면 연금 재정은 올해부터 적자로 돌아서 갈수록 그 폭이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노조와 야당은 연금 재정 적자는 정년 연장이 아니라 부유층 증세를 통한 재정 확대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민의 약 70% 반대 속에서도 연금개혁법이 공포되자 ‘이제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20일 파리 동역에서 만난 워킹맘 마리옹 소아비네 씨는 “정부 입법을 막기엔 이미 늦어버렸다”면서 “고령 인구가 늘고 있기 때문에 정부 방향대로 정년을 늦추는 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물론 여전히 많은 프랑스인은 연금개혁법에 반대한다. 프랑스 방송 BFMTV의 17일 설문조사 결과 응답자의 64%가 ‘연금개혁 반대 시위를 계속하는 데 찬성한다’고 답했다. 이 응답률은 법 공포 전인 지난달 말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BFMTV는 전했다.
법 공포 후 벌어진 반대 시위에서는 마크롱 대통령에게 항의하는 뜻으로 프라이팬이나 냄비를 두들기는 사람이 많아졌다. 글로벌 가구 업체 이케아는 가격표가 붙은 자사 판매 냄비 사진에 ‘이 가격이면 소리를 낼 수 있다’는 카피를 붙인 광고를 트위터에 올리기도 했다.
노조가 연금개혁법 통과 전부터 지금까지 끈질기고 강도 높은 반대 시위를 지속할 수 있는 것은 프랑스 노조 제도의 특징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일간 르몽드는 최근 스페인 노조는 연금개혁안을 강력히 지지한다면서 “프랑스와 스페인 노조 제도의 차이”를 짚었다. 스페인 노조의 단체교섭력이 프랑스보다 크다 보니 노조가 시위보다는 협상 테이블에서 노조에 유리한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프랑스 노조는 교섭력이 약해 파업과 시위로 권한을 행사하려 한다는 설명이다. 프랑스 노조가 제도상 교섭력은 약하지만 조합원 동원력은 강하기 때문에 파업을 지속하면서 정부 또는 사측과의 갈등을 장기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혁명 전통 무시한 마크롱”
프랑스 언론은 마크롱 대통령의 ‘위에서 아래로 내리꽂는 리더십’도 대중의 거센 반발을 불렀다고 분석한다. 유로뉴스는 “다른 국가들은 정년을 2년 연장한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혼란에 빠지지는 않을 것”이라며 “연금개혁을 압도적으로 반대하던 프랑스 대중은 마크롱 대통령의 하향식 리더십 때문에 더 크게 분노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마크롱 대통령이 충분한 국민 설득 없이 개혁을 밀어붙였다는 얘기다.
특히 마크롱 대통령이 지난달 16일 하원에서 반대가 우세하다고 판단해 헌법 49조 3항을 통해 의회 표결을 건너뛰고 법안을 통과시킨 게 결정적이었다는 지적도 있다. 마크롱 대통령이 헌법 규정을 따르긴 했지만 의회 민주주의 절차를 생략하면서 국민 의견을 무시했다는 점에서 분노가 커졌다는 것이다. 역사학자 장 가리그 씨는 TF1 방송 인터뷰에서 “마크롱 대통령이 헌법 49조 3항을 사용해 국민 뜻을 무시하고 민주적 절차를 우회해 (프랑스 대혁명이 시작된) 1789년과 19세기 혁명으로부터 물려받은 전통과 국민 주권을 무시했다”고 주장했다.
현장에서 만난 시민들은 연금개혁 반대 시위를 찬성하는 또 다른 이유로 정부가 법 시행 과정에서 세부 내용을 조금이라도 수정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소아비네 씨는 “노조가 시위를 계속해 협상 수단을 마련하려는 것 같다”며 “법이 시행되더라도 정부가 직역별로 퇴직 제도를 더 연구해 대안을 마련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20일 시위 행렬에 있던 CGT 관계자 자크 트리케 씨는 “정부 입법을 돌이킬 수 없다는 건 알지만 젊은이들이 은퇴 이후 불이익을 많이 보지 않게 노력하려는 것”이라며 “파업과 집회 등을 통해 계속 (정부와) 싸울 것”이라고 밝혔다.
마크롱, 잇단 개혁 드라이브
임기가 3년 남짓 남은 마크롱 대통령이 연금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국정 운영 동력을 상실한 게 아니냐는 관측이 적지 않다. 파리 동역에서 만난 블라디미르 유이안코프 씨는 “애초에 마크롱 대통령이 좌파도 우파도 아닌 실용적인 인물이라고 좋아했는데 이번 연금개혁으로 우파 면모를 드러냈다”며 “그를 대통령으로 뽑은 걸 후회한다”고 말했다. 프랑스 여론조사기관 이포프에 따르면 이달 마크롱 대통령에 대한 국민 만족도는 26%로 3개월 연속 하락세다.
리더십 위기를 맞은 마크롱 대통령은 새로운 개혁 어젠다를 잇달아 띄우며 프랑스 정국을 흔들고 있다. 연금개혁에 묶여 있는 국민 관심을 돌려 국정 운영 주도권을 다시 쥐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그는 직장, 이민, 교육 및 보건 분야 등 3가지 추가 개혁 방안을 밝히며 “(프랑스 혁명기념일인) 7월 14일까지 첫 번째 성과를 내놓겠다”면서 ‘개혁 속도전’에 나섰다.
다만 독선적이란 이미지에서 벗어나 반대파를 다독이려는 듯 자신의 실책도 인정한다. 재집권 1주년을 앞둔 23일 일간 르파리지앵 인터뷰에서 마크롱 대통령은 “내가 연금개혁 논의에 충분히 참여하지 않았던 것은 어쩌면 실수였다”며 “(지금은 개혁 필요성과 관련해) 명확하게 전달되지 않은 문제들이 있기 때문에 공개 토론에 다시 참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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