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반도체 기업 브로드컴은 삼성전자에 와이파이와 블루투스 등 스마트폰 필수 부품을 3년간 장기 계약할 것을 강요한 혐의로 공정거래위원회의 조사를 받아 왔다. 매년 7억6000만 달러 이상의 부품을 삼성전자가 구매하지 않으면 차액을 브로드컴에 물어줘야 하는 게 불공정 계약의 핵심이었다.
브로드컴은 공정위의 조사가 이어지자 지난해 7월 이 건과 관련한 동의의결을 신청했다. 2011년 공정거래법 개정을 통해 처음 도입된 동의의결 제도는 공정위의 조사를 받는 기업이 시정 방안을 만들어 제안하면 공정위가 이를 받아들이고 조사나 제재를 중단하는 제도다. 올해 초엔 200억 원의 상생기금을 만드는 내용을 중심으로 한 자진 시정안을 내놨다. 공정위는 이르면 이달 중순 전원회의를 거쳐 브로드컴의 자진 시정안을 확정할 것으로 전해졌다.
관련 업계에서는 공정위가 현재 브로드컴의 자진 시정안을 받아들일 경우 계약 당사자인 삼성전자로선 피해를 구제받을 길이 사라지는 것 아니냐는 반응이 나온다. 삼성전자는 브로드컴의 부품을 장기 구매하는 과정에서 할당을 채우기 위해 필요한 양보다 부품을 많이 구입했고 이 부품들이 악성 재고화하는 등 수천억 원의 피해를 입은 것으로 전해진다.
동의의결 제도는 조사를 받는 기업으로선 신청 자체가 법 위반 사실을 인정한다는 의미가 아닌 데다, 과징금과 검찰 고발도 피해 갈 수 있는 좋은 장치다. 하지만 국정감사 등에선 정작 동의의결이 피해자 구제에 있어선 부족한 부분이 많다며 ‘면죄부’ 논란이 끊이지 않아 왔다.
공정위의 동의의결로 피해자 구제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사례는 여럿이다. 국내 이동통신사에 아이폰 광고와 무상수리 비용을 넘긴 애플코리아는 2021년 1000억 원 규모의 상생지원안을 내놓으며 동의의결을 최종 확정지었다. 이후 정치권에서는 애플코리아가 동의의결을 확정한 뒤에도 여전히 통신사에 광고비를 전가해 상생지원금 재원을 마련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소프트웨어 제작업체인 SAP코리아는 2014년 구매자와의 불공정 거래 관련으로 2014년 동의의결 조치를 받았지만 동의의결 전 확정한 기부 건으로 공익법인 및 기금 출연을 대체하는 등 피해 구제에 소극적이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동의의결 제도가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기업까지 적용된다는 점에서 보다 신중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중소벤처기업연구원은 2월 발간한 ‘중소기업 피해구제 활성화를 위한 동의의결 제도의 실효성 제고 방안’ 보고서에서 “동의의결의 긍정적인 기능에도 소비자 피해 구제나 경쟁 질서 회복보다는 상생 방안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다”며 문제를 제기했다. 이어 “피해자가 중소기업일 때는 상생 방안보다는 직접적인 금전적 피해 보상 위주의 운영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삼성전자와 브로드컴의 동의의결이 현재의 자진 시정안대로 확정될 경우 삼성전자가 피해를 구제받을 길은 사실상 사라진다고 봐도 무방하다. 민사소송을 진행한다고 해도 공정위의 제재를 받지 않은 건에 대해 법 위반 사실을 증명하는 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신속한 피해 복구가 동의의결 도입 취지라면 동의의결로 피해 보상이 제대로 이뤄지는지 신중히 살펴야 하는 것도 공정위의 의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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