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람객이 전시장에 입장한다. 그 뒤를 따라볼 때가 있다. 전시장 계단을 오른다. 어둑한 공간에 들어서니 주변이 아득해진다. 어둠에 익숙해질 때쯤 빛이 보이고, 돌아서니 대형을 갖춘 백자들이 한꺼번에 반긴다. 관람객의 “와!” 하는 탄성을 듣고 나면 무언지 모를 뿌듯함을 느낀다.
서울 용산의 리움미술관에서는 올 2월 말부터 ‘조선의 백자, 군자지향’전이 진행되고 있다. 다양한 조선백자를 한자리에서 선보이고, 그 안에 조선 사람들이 이상적 인간상으로 여겼던 군자의 덕목이 깃들어 있음을 조명하는 기획전이다. 이 전시는 집중도가 가장 높은 초입에서부터 어두운 공간에서 빛나는 백자에 압도되는 경험으로 시작한다. 국보, 보물의 절반을 포함한 조선백자 185점을 전시하는 ‘조선백자 토털전’인 데다가 무료이기 때문에 고미술을 접할 좋은 기회이다.
명품에 새로운 연출을 더한 효과가 있었는지 지난 두 달간 6만 명 이상의 관람객이 전시장을 다녀갔다. 이 추세로는 리움미술관 역대 고미술 전시 중 가장 많은 10만여 명의 관람객을 기록할 것으로 전망된다. 전시장을 찾는 젊은층이 많아져 연령대가 다양해졌고, 전시를 2회 이상 찾는 N차 관람객들도 있다는 소식을 들으니 내심 다행스럽다. 고미술은 공부의 대상이라는 대중의 인식에 변화가 찾아온 것만 같아 반갑기만 하다.
도자기의 역사를 연구하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전시와 강연으로 관람객을 맞이하는 일을 오래 해왔지만, 이렇게 많은 관람객과 소통한 적이 또 있었나 싶다. 연이 닿는 관람객에게는 전시에 풀어낸 의도나 주요 작품에 대해 기획자 입장에서 설명할 때가 있다. 그러면서 자주 듣게 되는 질문이 ‘전시된 작품 중 최고의 작품을 꼽아 달라’는 것이다. 즐거우면서도 난처한 이 질문에 나름 재치를 발휘해 ‘오늘은 이 작품입니다’라며 답을 한다. 그렇게 꼽았던 작품 중 관람객들의 호응이 컸던 네 작품을 소개하며 독자들과 전시장을 함께 거니는 기쁨을 누리고 싶다.
‘백자청화동채운룡문 병’(19세기)은 출품작 중 가장 화려한 백자이다. 청화 안료를 사용하여 마치 구름 속에서 언뜻언뜻 몸을 내보이는 듯한 용을 그린 후 배경에 진홍색의 동 안료로 구름을 표현했다. 붉은색이 만들어내는 강렬함이 하얀 여백과 대비되어 깊은 인상을 남긴다. 관람객은 짙은 노을 속을 나는 용을 보는 것 같다며 우리 백자의 다채로움에 새삼 놀란다.
‘백자청화 인물문 병’(19세기)은 이번 전시에서 관람객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고 있는 작품이다. 커다란 나무에 그네를 걸고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타고 있는 소녀가 시선을 끈다. 더군다나 소녀가 고개를 뒤로 돌려 어깨너머로 우리를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더욱 귀엽게 느껴진다. 관람객들은 그네 타는 소녀에게 춘향이라는 별명을 지어주기도 하면서 저마다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느라 작품 앞에 한참을 머무른다.
‘백자 반합’(15세기)은 당당하면서도 단정하고, 풍만하면서도 안정감이 느껴지는 그릇이다. 조선 초기 왕실에서 사용한 백자들은 이렇게 담백하면서도 엄정한데, 새로운 사회의 정돈된 분위기를 반영한 듯하다. 그렇다고 마냥 긴장을 하고 보아야 하는 규칙이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관람객은 이 반합을 보고 고봉밥을 내주시던 할머니가 생각난다고 했고, 반구형의 잘 다듬어진 뚜껑을 보니 귀여운 도토리가 떠오른다는 관람객도 있었다.
‘백자철화 초화문 호’(17세기)는 이번 전시의 웃음 담당이다. 세 개의 꽃과 두 개의 뿌리를 그린 붓질이 거칠어 전문가의 솜씨가 아님을 알 수 있는데, 그 표현이 제약 없이 자유로워 마치 외계인을 보는 듯 우스꽝스럽다. 그런 모습 때문인지 관람객들은 모두 이 작품을 보고 ‘피카소’를 떠올린다. 그러나 이 꽃이 사실 국화를 그린 것임을 설명하면 더 큰 웃음이 되어 돌아오곤 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다. 알면 알수록 깊은 맛이 나는 우리 고미술에 제격인 말이다. 그렇지만 이 말이 때로는 관람객의 자유로운 감상을 막기도 한다. 역사적 배경을 알아야 비로소 무언가가 보인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관람객이 자신만의 배경으로 풀어낸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들은 친근하고 따뜻해서 역사적 사실에 가려 보이지 않던 조선백자의 매력을 더욱 풍성하게 한다. 이제는 ‘아는 만큼 보인다’가 아니라 ‘알던 것으로도 보인다’라는 편안한 마음으로 조선백자, 나아가 우리 고미술을 바라봤으면 한다. 그때 생기는 개성 넘치는 감정들이 감상의 자신감을 가져다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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