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에서 출석요구서를 받으면 머리가 복잡해지는 것은 정치인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수사 상황과 여론을 살피기 위해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시간을 끌기 일쑤다. 현역 의원의 경우 “국회 일정이 있다”는 게 불출석 사유의 단골 메뉴이고, “수술이 예정돼 있다”거나 “변호인이 다른 스케줄이 있다”며 출석을 미룬 정치인도 있었다. 반면 정치인이 자발적으로 검찰청에 출석하기도 한다. 그 속에는 검찰과의 치열한 수 싸움이 깔려 있다.
▷형사소송법에는 “수사에 필요한 때” 피의자를 불러서 조사할 수 있도록 돼 있다. 출석 조사 절차의 주도권은 검찰에 있다는 얘기다. 피의자가 출석을 미룰 수는 있지만 계속 피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반복적인 출석 거부는 체포의 사유가 되고, 도주 및 증거 인멸 우려를 높여 구속될 가능성도 커진다. 이런 한계 속에서 피의자들은 최선의 출석 시점을 고민한다.
▷정치인들은 정치적 손익도 계산해야 한다. 자진 출석은 ‘내 발로 떳떳하게 나갔다’고 말할 명분이 생긴다는 점에서 하나의 선택지가 된다. 2003년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차떼기 사건’과 관련해 “내가 감옥에 가겠다”며 자진 출석하고, 2019년 황교안 당시 자유한국당 대표가 “내 목을 쳐라”라며 검찰청에 나온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검찰로서는 정치인이 스스로 찾아오는 것이 달갑지 않다. 검찰 출신 변호사는 “수사팀에서 준비가 덜 됐어도 그냥 돌려보내면 ‘조사받겠다고 온 사람을 왜 조사 안 하냐’는 말이 나올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자진 출석한 정치인들은 대부분 조사는 받았다. 2018년 ‘미투’ 의혹이 제기된 뒤 잠적했던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갑자기 검찰청에 나타났을 때 수사팀에선 불만의 목소리가 있었지만 일단 조사를 진행했다.
▷‘전당대회 돈봉투 의혹’과 관련해 송영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일 검찰에 자진 출석한 것도 이런 점들을 두루 고려한 전략으로 보인다. 하지만 검찰은 송 전 대표를 아예 조사하지 않고 돌려보냈다. 특별수사 경험이 많은 한 법조인은 “어지간하면 차라도 한잔 내줬을 텐데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한창 수사망을 좁혀가고 있는 검찰로서는 전 야당 대표를 문전박대했다는 비판을 들을지언정 ‘패’를 보여줄 수 없는 시점이라는 취지다.
▷유·무죄는 증거에 따라 갈리는 것이지 기습 출석을 한다고 해서 달라지지는 않는다. 안 전 지사는 유죄가 확정돼 3년 6개월간 복역한 뒤 출소했고, 황 전 대표는 재판이 진행 중이다. 송 전 대표 역시 증거에 따라 처벌 여부가 결정될 것이다. 법적인 문제는 정상적인 법적 절차를 통해 대처하는 것이 최선이다. 다른 길은 없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