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보더라도 슬픈 작품이 있다. 카미유 클로델이 국가의 의뢰를 받아 제작했다는 청동상 ‘성숙’은 구도부터가 애처롭다. 젊은 여자는 무릎을 꿇고 늙은 남자를 향해 두 손을 뻗으며 뭔가를 애원하고, 그 남자는 그녀를 외면하고 늙은 여자에 이끌려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
제목에 충실하게 해석하자면 ‘성숙’은 젊음에서 노년과 죽음으로 이어지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서글픈 운명을 형상화한 것으로 볼 수 있고, 그렇게 말하는 비평가들도 있다. 그러나 작가가 젊은 여자의 모습을 분리해 이후에 별개의 청동상과 석고상으로 만들고 ‘애원’이라는 제목을 붙였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꼭 그렇게 볼 것도 아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후 동생인 시인 폴 클로델은 눈물 없이는 ‘성숙’과 ‘애원’을 볼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조각 속의 젊은 여자가 누나라며 “오만하고 당당하던 그녀가 모욕당해 무릎을 꿇은 채 애원하는 모습으로 자신을 표현”한 것이 너무 가슴 아프다고 했다. 스물네 살이나 많은 로댕과의 관계, 천재적인 예술가였으면서도 꽃을 피우지 못하고 정신질환자 수용소에서 마지막 30년을 살았던 삶이 떠올라서 그랬다. 그녀를 가둔 것은 가족이었다. 의사가 집으로 데려가라고 권해도 어머니가 거부했다. 그래서 ‘성숙’과 ‘애원’은 삼십 대에 제작된 것이지만, 그녀가 살아왔고 살아가야 할 고통스러운 삶을 예시한 작품이었다. 그것은 그녀가 처한 심리적 현실의 반영이었다.
그녀는 여자라는 이유로 국립미술학교 입학을 거부당하고 당대의 대가였던 로댕에게는 이용만 당했다. 로댕의 이름으로 나간 많은 청동 흉상들은 그녀의 작품이었다. 세상이 그녀의 천재성을 알게 된 것은 그녀가 죽고 몇십 년이 지나서였다. 무릎을 꿇고 애원하는 여인의 청동상이 유독 슬픈 이유다. 억눌리고 배척당하는 이 세상의 약자들은 모두 그러한 모습일지 모른다. 클로델은 자기도 모르게 그들을 재현한 셈이다. 예술은 그렇게 자기를 넘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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