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7일(현지 시간) 미국 뉴욕 록펠러센터 식당가. 뉴욕 최고 식당들이 모인 이곳에 지난해 10월 문을 연 ‘나로(NARO)’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겨울에 스케이트장으로 변하는 광장 앞, 엘리베이터 옆자리 이른바 명당에 자리한 이 식당은 이름이나 인테리어로 볼 때 한식당 같지 않다. 메뉴판에서 ‘Tangpyengchae(탕평채)’ ‘Bugak(부각)’ ‘Kkwabaegi(꽈배기)’ 등을 보고 나서야 알아챌 수 있다. 저녁 코스 가격이 1인당 165달러(약 23만 원) 수준으로 개점하자마자 뉴욕타임스(NYT)의 주목을 받았다. 뉴욕 식당가를 벌벌 떨게 하는 NYT 유명 음식평론가 피트 웰스는 리뷰에서 ‘훌륭함(excellent)’을 뜻하는 별 3개를 주며 “한국 전통요리에서 새로운 마법을 발견했다”고 극찬했다.》
나로는 미슐랭 별 2개를 받은 모던 한식당 ‘아토믹스’를 이끈 박정은 대표와 박정현 셰프 부부가 열었다. 박 대표는 “한국에서 태어나 한식을 먹고 자란 경험을 음식에, 그릇에, 인테리어에 종합 예술로 전달하고 싶었다”며 “언어를 그대로 이어가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 간장도 그대로 ‘간장’이라고 손님에게 알린다”고 말했다.
뉴욕 외식업계를 ‘한식 바람’이 흔들고 있다.
맨해튼 빌딩들 “한식당 와 달라”
한국 음식이 세계인의 음식이 된 지는 꽤 됐다. 미국 코스트코, 홀푸드 같은 대형마트에서 김치, 라면은 물론이고 한국 만두도 쉽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최근 한식 바람의 중심에는 코리아타운을 벗어난 미슐랭급 ‘오트 코리안 퀴진(고급 한식)’이 있다.
지난해 10월 선정된 뉴욕시 72개 미슐랭 식당 중 9개가 한식당이었다. 전년 6개에서 늘었다. 72개 중 미슐랭 별 2개 식당은 12곳뿐으로 한식당은 ‘정식(Jungsik)’ ‘아토믹스’가 들었다. 서울에 있던 ‘정식당’이 2011년 상륙한 정식은 2014년 별 2개를 받았다. 정식 시그니처 디너 코스는 1인당 295달러(약 40만 원)나 하지만 예약조차 어렵다.
뉴욕 한식당 중에 10월 발표될 새 미슐랭 후보로 나로를 비롯해 서너 곳이 꼽힌다. 지난달 문을 연 한식 스테이크하우스 ‘안토’, 올 초 개장한 김훈이 셰프의 ‘메주’ 등이 대표적이다. 안토는 뉴욕 명물이던 이탈리안 식당 ‘펠리디아’ 자리를 접수해 개장 전부터 화제였다. 토니 박 안토 대표는 “미슐랭 기준을 맞추려면 맛은 기본이고 테이블당 서버 2명, 방대한 와인 리스트, 그릇과 디스플레이 등 어마어마한 투자가 필요하다”며 “당장은 손해를 보더라도 까다로운 입맛의 뉴욕 파인다이닝에서 승부를 보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맨해튼 부동산 개발업자들은 한식 바람을 눈치채고 입점 영입에 나서고 있다. 록펠러센터는 팬데믹 기간 대규모 개선 작업을 진행하면서 박정은 대표에게 먼저 입점을 제안했다. 포스트모던한 건축물로 역사적 랜드마크인 뉴욕 AT&T 빌딩도 최근 리노베이션을 하면서 미슐랭 한식당 ‘꽃(cote)’에 러브콜을 보냈다. 지역 매체에 따르면 사우디아라비아계 펀드 투자를 받아 3개 층에 걸쳐 기념비적 한식당이 들어설 것으로 보인다.
뉴욕 패션스쿨 FIT 박진배 교수는 “1990년대 ‘노부’ 같은 일본 스타 셰프들이 돌풍을 일으키던 시기와 비견될 만하다”며 “뉴욕 현지인이 정통 한식을 미식의 세계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라고 말했다. 뉴욕 일식 미슐랭 식당은 18곳. 고급 한식은 이제 시동이 걸린 셈이다.
코리아타운에서 전문 셰프로
미국 한식은 한인 상점이 밀집한 코리아타운 위주로 형성됐다. 한국인의 본격적인 미국 이민 행렬은 1960년대 중반 미 이민법 개정 이후 시작됐다. 뉴욕 맨해튼 32번가 코리아타운은 1970년대 ‘뉴욕곰탕’ ‘우촌’ ‘강서회관’ 등이 들어서며 이뤄졌다. 교민에 이어 유학생과 관광객이 더해지며 새벽까지 불야성인 거리로 확장됐다.
1인당 30, 40달러 이상 받기 어려웠던 한식이 고급 음식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2010년대 중반부터다. 2009년 한식으로 미슐랭 스타를 세계에서 처음 받은 한인 2세 김훈이 셰프가 한식 고급화의 길을 열었다. 이후 한국의 2030 전문 셰프들이 야심 차게 미국 땅을 밟았는데 마침 한류 열풍과 잘 맞아떨어졌다.
뉴욕에서 정식을 제외한 미슐랭 한식당은 모두 2015년 이후 문을 열었다. 오이지 미(2015년), 꽃(2017년), 제주 누들바(2017년), 아토믹스(2018년), 꼬치(2019년), 주아(2020년), 마리(2021년), 주막반점(2021년)이 그 주인공들이다.
이들의 실력은 미국 요리계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제임스 비어드 2023’에서도 인정받았다. 나로와 아토믹스, ‘아토보이’ 메인 요리사인 박정현 셰프는 올해 ‘제임스 비어드’ 뉴욕 지역 베스트 셰프 5인에 들었다. 꽃은 미 전역을 통틀어 ‘뛰어난 와인-음료 프로그램’ 부문 톱5에 이름을 올렸다.
2010년대 중반 이후 BTS(방탄소년단)를 비롯한 K팝과 한국 영화 및 드라마의 인기가 높아진 것도 고급 한식 열풍의 이유에서 빼놓을 수 없다. 정보기술(IT) 업계 직장인이자 한식 마니아를 자처하는 수하리 씨(36)는 “한국 드라마에선 점심시간에도, 퇴근 후에도 늘 모여서 무언가 먹고 있다. 재택근무가 많은 미국에선 멀어진 풍경”이라며 “그래서 한식이 더욱 궁금해졌다”고 말했다.
안동, 제주 된장 ‘찐(眞)’ 코리안
이전 오트 코리안의 중심이 모던 한식이었다면 최근에는 나로나 안토처럼 완벽한 전통 한식으로 트렌드가 진화하고 있다. 안토는 된장과 고추장을 경북 안동에서 공수한다. 전통 재래식 방법으로 끓이고 말린 메주와 고추를 가지고 손으로 빚은 재래식 장(醬)이다. 한국 장을 미국에 들이기 위해 미 식품의약국(FDA) 인증 절차까지 마쳤다. 고급 프랑스 식당이 프랑스 현지 버터나 치즈를 쓰듯, 한식 본연의 맛을 살리려면 재래식 유기농 된장 고추장으로 음식 맛의 수준을 끌어올려야 한다는 전략이다.
미슐랭 레스토랑 ‘세종(Saison)’ 출신 조시 코플랜드 안토 총지배인은 떡갈비, 물회 같은 음식 이름을 한국식 그대로 발음해서 손님에게 알린다. 역시 미슐랭 레스토랑 출신인 한국계 미국인 주 리 와인 디렉터는 “어릴 때 학교에 한국 반찬을 싸가면 ‘이게 무슨 냄새냐’며 놀림을 받았다. 이제는 한식이 파인다이닝의 중심이 됐고, 한식에 맞춰 와인 리스트를 만들 수 있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김훈이 셰프는 지난해 뉴욕 퀸스 롱아일랜드시티에 한국 반찬 가게 ‘리틀반찬숍’을 낸 데 이어 이곳과 일종의 ‘비밀통로’로 이어지는 고급 식당 ‘메주’를 올 초 열었다. 제주도에서 공수한 유기농 된장을 쓰며 발효 음식과 유기농 건강식 위주의 메뉴를 선보이고 있다.
이 고급 한식당들은 음식을 담는 그릇이나 식기도 한국 디자이너가 제작한 것을 주문해 받는다. 박정은 나로 대표는 “한국에 훌륭한 디자이너들이 너무 많다. 식당을 매개로 하나의 복합 문화 공간을 선보인다고 생각한다”며 “한식 일식 이탈리안 각각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는 가운데 우리만의 음식을 잘 선보이는 것이 중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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