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의 도발]그래도 취임 1주년 기자회견 해야 하는 이유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5월 5일 14시 00분


“취임하고 매일 보다 안 보니까 좀 섭섭하죠?” 윤석열 대통령이 기자들한테 농담을 다 했다. 2일 용산 대통령실 앞 파인그라스 마당에서 대통령실 참모진과 기자들과 오찬을 하는 자리에 깜짝 등장해 도어스테핑(출근길 문답)을 언급하며 “그런데 나는 살이 찌더라고” 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2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 앞 야외 정원인 ‘파인그라스’에서 출입 기자단과 오찬 간담회를 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대통령이 한때 애착했던 도어스테핑은 ‘날리면 파문’ 끝에 작년 11월 허무하게 폐지됐다. 인터뷰도 해외 언론하고만 하기에 난 윤 대통령이 국내 언론은 보지도 않는 줄 알았다(신년 인터뷰는 따로 언급하겠음). 그런데 “지금도 습관이 돼서 꼭두새벽 눈을 떠 언론 기사 스크린을 한다”고 말했단다.

그러면서도 윤 대통령은 취임 1주년 기자회견을 할지는 밝히지 않았다. “여러분과 그냥 이렇게 맥주나 한잔하면서 얘기하는 기자 간담회면 모르겠는데, 무슨 성과 가지고 자료를 쫙 주고서 잘난 척하는 그런 행사는 국민들 앞에 예의가 아닌 것 같다”고 했다. 맞는 말씀이다. 기자들이 맥주 못 마셔 걸신들린 것도 아닌데 이런 식으로 퉁치고 넘어가는 건 국민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바쁜 독자를 위해 이어질 내용을 세 줄로 요약하면 이렇다.

① 윤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다 하는 신년 기자회견을 하지 않았다.

② 김영삼-김대중 대통령은 취임 1주년 기자회견도 했다.

③ 국민의 알권리를 위한 대통령 기자회견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다.

● 유신독재 때도 거른 적 없다
윤 대통령이 취임 1주년 기자회견을 꼭 해야 하는 이유는 우선, 취임 후 첫 신년 기자회견도 안 했기 때문이다. 신년 기자회견은 1968년 박정희 대통령이 처음 시작한 이래 역대 대통령들이 한 해 국정 목표를 밝히고, 국민의 알권리를 위해 기자들 질문을 받는 연례 의식(儀式)으로 자리를 굳힌 상태다. 박 대통령이 1967년 5월 6대 대선에서 재선된 뒤 이듬해 첫 신년 기자회견을 시작했듯, 암만 언론에 인색했던 대통령들도 취임 후 첫 신년 회견만큼은 빼먹지 않았다.

올해 1월 3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2023 국토부, 환경부 정부업무보고 모습. 대통령실사진기자단
그걸 윤 대통령은 안 한 것이다. 부처별 업무보고 받기에도 일정이 빠듯하다는 가당찮은 이유다. 대통령실에서 “신년 회견은 검토하지 않는다”고 밝힌 다음 날(2022년 12월 21일) 윤 대통령이 조간신문 사설 제목이라도 훑어봤는지 궁금하다.

· 부처 업무보고가 신년 기자회견을 대신할 순 없다(동아)

· 국민과 대화도, 신년회견도 모두 소통에 필요(조선)

· 신년회견 보류…대통령-국민 소통은 많을수록 좋아(중앙)

· 윤 대통령, 지지율 올랐다고 소통 닫아서야(한국)

대통령기록관 홈페이지를 보고 놀란 건, 박정희 대통령 때 시작된 신년 기자회견이 서슬 퍼런 유신독재 시절에도 한해도 안 걸렀다는 사실이다. 부처 업무보고처럼 형식적으로 열렸던 것도 아니다. 유신 선포 이듬해인 1973년엔 감히 “초당적 거국내각을 구성할 의향이 있느냐”고 질문해 “정당이나 정파를 가릴 것 없이 성실하고 유능한 인사를 과감하게 기용할 생각”이라는 답변을 끌어내기도 했다.

‘초당내각 구성용의’라는 제목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1973년 신년 기자회견 내용을 보도한 동아일보 1973년 1월 12일자 1면 보도.


● 내년 초까지 기다릴 순 없다
안다. 윤 대통령은 1월 2일 자 달랑 모 조간신문과 신년 인터뷰해 다른 모든 언론에 물을 먹였다. 과거 일부 대통령이 창간기념일 특별회견 같은 걸 한 적은 있다. 하지만 이건 문재인 전 대통령을 능가하는 신종 갈라치기 전법이었다.

그 조간과 나머지 언론의 갈라치기 수준이 아니다. 그 독자들과 나머지 국민과의 갈라치기여서 더 위험하다. 굳이 ‘뉴스프리존’ 공희준을 인용하자면 “약육강식의 살벌한 사회를 국가경쟁력 강화라는 명분 아래 만들어갈 작정임을 윤 대통령은 OO일보와의 협업을 통해 공공연히 선포한 셈”이다.

그래서 취임 1주년 기자회견은 꼭 해야 한다는 거다. 5월 10일 취임 첫 돌을 넘기면 내년 신년 기자회견까지 기다려야 한다. 이건 출입기자들과 맥주 한잔 하거나 김치찌개를 끊여 먹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최소한 지난 대선에서 윤 대통령을 찍었던 국민, 그럼에도 갈라치기로 따돌렸던 국민과 화해하기 위해서라도 대통령은 더 늦기 전에 기회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 YS “‘문민독재’란 말 이해할 수 없다”
서울 김영삼도서관에서 문민정부 출범 30주년 기념식이 열린 2월 24일 윤 대통령은 영상축사를 통해 “역사의 갈림길에서 늘 변화와 개혁의 길을 걸었던 김영삼(YS) 대통령의 뜻을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그 뜻을 이을 때가 지금이다. YS는 1994년 취임 1주년 기자회견 했다. 신년회견에서 “올해 국정목표를 ‘국가경쟁력 강화’에 두겠다”고 밝혔는데 두 달도 안 돼 또 했다. 취임 첫돌은 그만큼 중요해서다.

YS는 94년 2월 25일 북한의 핵개발을 저지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판단되면 핵투명성이 보장되기 전이라도 김일성과의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취임 100일 회견에서 “핵을 가진 자와 악수할 수 없다”던 초강경 태세를 뒤집는 뉴스였다(그해 7월 김일성이 사망하지 않았다면 진짜 남북정상회담할 뻔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취임 1주년 기자회견 내용을 보도한 동아일보 1994년 2월 26일 지면. 김 전 대통령은 당시 기자회견에서 “개혁 효과를 실감하지 못 한다는 지적이 있다”는 기자의 질문에 “대통령이 책임지는 대통령중심제를 문민독재라고 한다면 과거 독재로 돌아가자는 얘기인가”라며 반박했다.
취임 1년 당시 대통령 지지도가 60%대나 됐지만 기자들은 사정없었다. “개혁 효과를 실감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많은데 어떻게 생각하는지” 질문에 “문민독재니, 1인 통치니 하는데 이상하다”는 답변은 윤 대통령도 들여다봤으면 좋겠다. 86운동권과 달리 진짜 민주화투사였던 YS는 비밀이 새어나갈까 우려해 혼자 결단을 내리는 버릇이 몸에 배어있었다. 내각은 동료 아닌 병졸처럼 여기곤 했다. 취임 첫돌 무렵의 언론 질문이 국민의 소리다. 그때 대통령이 잘 받아들였다면 97년 정권 말 외환위기 같은 건 안 겪었을지 모른다.

● DJ “의원 빼내기, 잘못 많다” 인정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에 성공한 김대중(DJ) 대통령도 99년 2월 25일 취임 1주년 기자회견을 했다. 98년 말 DJ는 “연두기자회견 대신 직접 국회에 나가 한 해의 국정방향과 정책에 대해 연두교서를 발표하는 것이 진정한 민주주의 방법으로 생각된다”고 했었다. 하지만 해가 바뀌자 연초 청문회에 설 연휴가 겹쳤으니 2월 21일 ‘국민과의 TV 대화’, 25일 취임 1주년 기자회견을 연달아 열겠다고 했다.

국민과의 TV 대화 다음 날 동아일보 사설 제목은 ‘대화인가, 홍보인가’였다. 경제위기 극복 성과를 일방적으로 알리는 TV쇼였기 때문이다. 이번 대통령실도 작년 말 국민 패널 100명이 등장한 ‘국정과제 점검회의’가 기자회견보다 낫다고 믿고 싶겠지만 기자라는 ‘밉상 직업’이 존재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윤 대통령은 연금 개혁에 대해 “이번 정부 말기나 다음 정부 초기에 ‘연금 개혁의 완성판’이 나오도록 시동을 걸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럼 그때까지 시동이나 걸면서 어떻게 연금개혁 하는 정부랄 수 있느냐”고, 그때 그 자리에 기자가 있다면 당장 질문했을 거다.

1999년 2월 25일 취임 1주년 기자회견 당시 모습과 기자의 질문에 대답하는 김대중 전 대통령. 동아일보DB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 DJ는 “야당을 국정의 동반자로서 존경하고 협조하겠다”며 사과했다. 여소야대로 출범한 탓에 무려 36명의 한나라당(현 국민의힘) 의원들을 탈당시켜 34명을 새정치국민회의(현 더불어민주당)에 입당시킨 일을 언급한 거다. DJ가 ‘야당 의원 빼내기’를 않겠다던 기존 입장에서 나아가 “우리 잘못도 많다”고 인정한 건 기자들이 묻고 또 캐묻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장면이었다.

● 언론의 질문할 권리가 민주주의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도 2022년 1월 22일 취임 1주년 기자회견을 했다. 코로나 팬데믹을 통제하고 미국 경제를 재건하겠다는 선거 공약이 지나친 약속이 아니었느냐는 날카로운 질문도 쏟아졌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기자들 좋다는 대통령은 없는 모양이다(죄송합니다…). 아이젠하워는 1953년 “나는 매주 십자가에 올라가 못 박힌다”며 무례한 기자들에 대해 치를 떨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미국 대통령들이 기자회견을 계속하는 이유가 있다. 기자회견은 민주주의의 한 요소이기 때문이다(마사 조인트 쿠마 ‘프레지던트 메시지’).

국민의 알권리를 대신해 언론이 공직자에게 질문하는 권리는 민주주의와 연결돼 있고, 선출된 공직자들은 기자들이 묻는 까다로운 질문에 답하면서 정책을 국민에게 설명할 의무가 있다. 그래서 1943년부터 백악관을 출입했던 1번 질문 기자 헬렌 토머스(1920~2013)는 “기자회견은 대통령에게 정기적으로 질문할 수 있는 이 사회의 유일한 공개토론의 장이다. 만일 기자회견이 없다면 대통령은 칙령을 내려 통치하거나 왕처럼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헬렌 토머스.


● 퇴임 1년 지나 자꾸 나오면 안 반갑다
도어스테핑도, 신년회견도, 취임 1주년 기자회견도 않는 윤 대통령에게 “초심을 기억해 달라”고 외치고 싶다. 윤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정직한 대통령이 되고 싶다”며 “정직한 대통령이란 국민과 소통, 의회 지도자들과 소통, 언론과 소통, 내각·참모들과 소통을 잘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했었다.

물론 소용없는 소리일지 모른다. 또 물론 윤 대통령은 2일 기자들과의 오찬 간담회 때 많은 얘기를 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궁금한 게 아직 많다. “변화가 느린 부분, 변화의 방향을 조금 더 수정해야 되는 부분”을 말했는데 무엇이 느리고 또 무엇이 수정할 부분인지도 알고 싶다.

지금이니까 대통령 생각이 알고 싶지, 대통령직 떠나면 알고 싶지도 않다. 현직 떠난 지 1년밖에 안 됐는데 국민에게 잊힐까 갖은 애를 쓰며 자꾸 등장하는(그러나 전혀 반갑지 않은) 전임 대통령을 떠올려보면 알 것이다. 대통령 기자회견은 대통령만이 누릴 수 있는 찬란한 특권임을 왜 모르는지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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