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에는 올림픽과 월드컵 경기에 밀려 인기가 한풀 꺾였지만 19세기 후반∼20세기 중반은 세계박람회의 전성시대였다. 그 이념과 문화유산이 세계 이곳저곳에 남아 있다. 세상 관광객들이 ‘인생 샷’을 찍는 배경인 에펠탑은 프랑스혁명 100주년 기념으로 개최된 1889년 파리 세계박람회의 상징물이다. 1962년 시애틀 세계박람회는 옛 소련의 최초 인공위성 발사에 충격을 받아 과학기술을 강조했다. 그 덕분인지 현재 시애틀 지역은 마이크로소프트와 아마존 본부가 있는 정보기술(IT) 도시로 다시 태어났다.
우리나라가 공식적으로 처음 참가한 세계박람회는 1893년 미국 시카고 세계박람회였다. ‘은자의 나라’라는 폐쇄적인 이미지를 벗고 국제사회의 당당한 가족이 되려는 첫걸음이었다. 당시 조선의 국력을 반영하듯 매우 좁고 외딴 공간에 ‘장난감 같은 한국 전시관’이 급하게 마련됐다. 대표단은 빈약한 출장경비 때문에 호텔에서 하숙집으로 옮겨야만 했다. 윤치호는 한국관에 전시된 초라한 물품과 꾀죄죄한 한국 대표단 모습에 창피해서 얼굴이 붉어질 정도라고 일기에 적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조선 전통 문화예술을 해외 공연한 최초의 문화사절단’으로 꼽히는 국악대는 그로버 클리블랜드 미국 대통령이 조선관을 지나가는 타이밍에 맞춰 축하의 풍악을 울려 그들의 소임을 완수했다.
두 번째로 참가한 세계박람회는 1900년 파리 박람회였다. 시카고 박람회와는 다르게 직접 파견된 한국인 관료가 아니라 현지 프랑스인들이 준비와 실무를 대행했다. 그리고 시카고 박람회에서는 주최 측이 건축한 파빌리옹 내부에 셋방살이 조선관을 임차했던 것과는 달리, 경복궁 근정전을 모델로 한 독립공간으로 한국관을 건축했다. 흥미로운 것은 국가를 상징하는 문장(紋章)과 엠블럼이 국제행사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파리박람회 본부에 보낸 공문서 양식 오른쪽 위쪽에 조선 왕가의 성씨 ‘오얏 리(李)’에서 착안한 이화문(梨花紋)과 하단 중앙에는 회오리 모양의 태극 직인이 각각 디자인되었다.
메이지 일본은 아시아 국가 중에서 세계박람회를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해 근대화의 우등생이 되었다. 1873∼1910년 사이에 모두 37번이나 국제박람회에 참가했다는 통계가 말해준다. 세계박람회에서 쌓아 올린 국가 이미지 개선과 서구화를 인정받아 1899년에는 서구 열강이 강요했던 ‘불평등 조약’을 폐지했다. 또한 일본 문화의 독특한 우수성을 홍보하여 유럽에 ‘자포니즘’으로 불리는 일본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자신감을 얻은 일본은 국제박람회를 발판 삼아 서양 강대국과 어깨를 겨루는 제국클럽에 가입하고자 애썼다. 1910년 영국 런던 외곽에서 열린 일본-영국 박람회는 오래된 형님제국 영국과 새내기 아우제국 일본이 손잡은 친선 행사였다. 박람회 기간에 일본이 한국 병합을 국제사회에 널리 알리고 공인을 얻고자 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일제 강점기는 한국인이 박람회에 동원되거나 전시물로 ‘사용’된 시절이었다. 1903년 오사카 내국권업박람회에서 오키나와 원주민, 대만 토속민, 조선 사람 등이 ‘인간전시’를 당했다. 1889년 파리 박람회와 1893년 시카고 박람회에서 시범을 보였던 ‘인종적 식민주의’를 흉내 낸 것이었다. 1929년 경복궁에서 열린 조선박람회는 일본제국이 보여준 식민지박람회 사용법의 정점이었다. 조선총독부가 갈무리한 식민지(인)의 계몽과 발전을 전 세계에 자랑하려는 의도였다. 57만 명 이상을 헤아리는 한국 구경꾼은 광화문 분수대 야광쇼와 전국 유람 미니기차 여행 등에 놀랐다. ‘식민지 근대화’라는 이데올로기를 지식인은 물론 한국 보통 사람들에게 심은 문화정치의 작품이었다.
광복 이후 대한민국은 남북 분단과 6·25전쟁, 경제 발전, 민주화운동 등으로 뒤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시카고 박람회 참석 100주년을 맞는 1993년에야 이 땅에서 처음으로 대전 세계박람회가 열렸다. 2012년에는 여수 세계박람회가 뒤를 이었다. 아쉽게도 이 두 박람회는 세계박람회사무국(BIE)이 공인한 등록박람회가 아니었기 때문에 개최 기간, 개최 비용, 전시 공간 등에서 일정한 한계를 감수해야만 했다.
우리나라는 세계박람회 역사 170여 년 만인 2030년에 부산에서 처음으로 등록세계박람회를 개최하려고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전 세계가 한류 열풍에 휘감겨 한국 배우기와 한국 따라 하기에 바쁜 지금, 우리는 어떤 형식과 내용으로 2030년을 준비할 것인가? 일본의 세계박람회 운영 사례를 위에서 시시콜콜 서술한 것은 본보기 또는 반면교사로 삼으려는 뜻이었다. 일본은 세계박람회를 매개 삼아 일본 문화를 선전했고 국내외 박람회를 외교 게임과 식민지 문화통치의 무기로 성공적으로 응용했음을 과소평가할 수 없다. 부산박람회를 지렛대 삼아 세계·식민박람회에서 ‘전시당했던’ 객체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재발명하는 능동적인 주체로 성숙하기를 기대한다.
이를 위해 첫째, 부산박람회의 우선 목표로 경제적 이해타산을 절대기준으로 삼지 않았으면 한다. 창출되는 고용 효과와 관광객 수입을 ‘짧게’ 계산하는 대신 전통을 재창조해 세계문화를 풍요롭게 한 나라로 자리매김하도록 ‘길게’ 봐야 더 좋다. 문화 자본의 소비공간과 유통기간이 더 넓고 길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둘째, 한류가 반짝 유행으로 사그라지지 않고 ‘지속가능한 K문화’로 성장하도록 이끌어주는 역할을 할 기념박물관을 건축하자. ‘은자의 나라’와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는 수동적인 이미지와 ‘빨리빨리 따라잡는 나라’라는 부정적인 편견에서 벗어나, 냉전체제 최후의 최전선에서 역동적으로 성취한 역사 유산을 전시해야 한다.
그 연장선에서 셋째, 2030년이 대한민국의 세계사적인 존재 이유와 사명감을 벼리는 전환점이 되도록 하자. 세계박람회는 새로운 세계관과 시대정신이 만들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신생 국가인 미국의 국경은 끊임없이 확장한다는 ‘프런티어 테제’가 시카고 박람회에 맞춰 발표됐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우리가 지나온 울퉁불퉁한 현대사를 거울삼아 활기찬 미래 청사진을 제안해야 할 결정적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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