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임원 A 씨는 올해 하반기(7∼12월)로 예정된 유럽 국가의 프로젝트 입찰 소식을 듣고 당황했다. ‘탄소중립(온실가스 배출이 사실상 제로가 되는 상태)을 선언한 기업만 입찰할 수 있다’는 특별한 조건이 달렸기 때문이다. 또 다른 유럽계 회사는 납품 조건으로 ‘RE100’(기업이 사용하는 전력의 100%를 태양광, 풍력 등 재생에너지로 전환하는 글로벌 캠페인) 참가를 요구했다. 그는 “미국과 유럽이 ‘시장의 룰’을 바꾸면서 탄소 배출이 많은 기업이 수출과 입찰 경쟁에서 불이익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유럽연합(EU)은 올해 10월 탄소 배출량이 많은 기업들에 부담을 지우는 ‘탄소국경조정제(CBAM)’를 시범 운영한다. 2026년 이 제도가 본격 시행되면 한국 주력 수출품인 철강이 직격탄을 맞는다. 유럽이 측정하려는 탄소 배출량에는 생산 과정에서 쓰인 열과 전력에서 발생한 ‘간접 배출량’까지 포함된다. 한국의 주력 수출품인 반도체의 경우 약 70∼75%가 간접 배출이다. 탄소무역 장벽이 확대되면 한국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와 같은 반도체 기업도 안심할 수 없다.
삼성전자가 경기 용인에 20년간 300조 원을 투자해 세계 최대 반도체 클러스터를 짓기로 했지만, 24시간 안정적으로 공급되는 전력 인프라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충남 당진 화력발전소 총발전량(6GW)을 끌어와도 부족한 판인데 EU의 간접 배출 기준과 RE100 목표를 달성하려면 해상풍력, 태양광 등 재생에너지로 남부 지역에서 생산한 전기를 멀리서 끌어와야 한다.
문제는 전기를 실어 나를 고압송전선로다. 한국전력은 8일 해상을 통해 호남 지역 등의 잉여 전력을 수도권으로 보내는 초고압직류송전(HVDC) 기간망을 구축한다는 계획을 내놨다. 하지만 전기요금을 묶어두는 바람에 지난해 32조 원의 적자를 내고 올해도 약 9조 원의 적자가 예상되는 한전이 ‘전기 고속도로’에 투자할 여력은 별로 없다. 여차하면 기업이 반도체 공장도 짓고 전력을 끌어오기 위한 고압송전선로까지 깔아야 할 판이다. 미국 등 경쟁국가는 세금을 깎아주고 보조금을 주면서 기업을 유치하는데 한국에선 공장도 짓고 전기도 직접 끌어와야 한다면 투자할 기업이 거의 없다.
‘탈탄소’는 정부의 일방적 의지나 몇몇 기업의 노력만으로는 어렵다. 문재인 정부는 무리하게 ‘탈원전’을 추진하면서 재생에너지 비중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전기요금을 묶어두고 인구와 공장이 밀집한 수도권과 해상풍력, 태양광 시설이 밀집한 남부 지역 간 전력 불균형을 방치하는 바람에 국가적 비효율을 키웠다. 수도권의 경우 전력 소비량이 발전량의 약 1.4배지만 그 밖의 지역은 발전량이 더 많다. 수요가 공급보다 많다면 가격이 올라가야 하지만 수도권이나 지방이나 전기요금은 동일하니 전력 소비량이 큰 인터넷데이터센터(IDC)가 수도권에 몰리는 게 현실이다.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한국 경제가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건 원자력 발전 등 효율적인 에너지 인프라를 구축하고 저렴한 산업용 전기를 공급해 수출 기업들을 키웠기 때문이다. ‘탄소중립 경제’ 시대의 과제는 청정에너지 인프라를 구축해 탄소 배출이 줄어도 성장할 수 있는 경제 시스템을 만드는 일이다. 전기요금을 찔끔 올리거나 한전 자구 노력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반도체, 전기차 배터리, 청정에너지 등 미래산업과 떼어내 접근하기도 어렵다. 미국이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을 만들어 에너지 안보와 청정에너지 산업 육성을 위한 10년간의 밑그림을 제시한 것처럼 미래산업과 일자리의 관점에서 ‘탄소중립 경제’의 큰 그림을 그리는 ‘한국형 IRA’를 고민해 볼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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