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껍데기’ 간호법 둘러싼 소모적 논쟁[오늘과 내일/이진영]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5월 10일 21시 4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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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사만 대우하는 흠투성이 간호법 대신
합리적 보건의료인력 활용 체계 만들어야

이진영 논설위원
이진영 논설위원
의사는 처음부터 의사였지만 간호사는 간호원에서 시작했다. 1903년 국내 최초의 간호원양성소를 설립하면서 ‘nurse’를 ‘간호원(員)’이라 번역했다. 일제강점기 때 여성은 ‘간호부(婦)’ 남성은 ‘간호사(士)’라 했고, 광복 후 남녀 모두 ‘간호원’이 됐다가 1987년 의료법 개정으로 ‘간호사(師)’로 바뀌었다. 의사(醫師) ‘선생님’처럼 간호사 ‘선생님’이 된 것이다. 간호계는 “간호 전문직의 위상을 바로 세운 이정표”라며 환호했다.

그리고 드디어 간호법 제정이다. 의료법에서 독립해 별도의 법을 갖는 건 간호계의 47년 숙원이었다. 하지만 간호법이 간호사의 끝 자를 ‘스승 사(師)’로 바꾼 것 이상의 실질적 변화를 가져올지는 의문이다. 현행 의료법과 보건의료인력지원법에서 간호 관련 조항만 떼어 엮어놓았기 때문이다. 간호법이 발효돼도 간호사는 여전히 ‘의사의 지도하에 진료의 보조’를 하는 존재다.

현상유지법이라고 문제가 없는 게 아니다. 모든 의료인(의사 치과의사 한의사 조산사 간호사)과 간호조무사와 안마사는 의료법 적용을 받는다. 모든 보건의료인들은 보건의료인력지원법의 지원을 받는다. 그런데 왜 간호사만 두 개의 법에서 떼어내 별도 법으로 대우해야 하나. 이는 13개 직역단체들이 간호법에 반대하며 던지는 근본적인 질문이다.

의료법 변호사법 같은 전문직 관련법은 그 직역이 아니라 사회를 보호하는 것이 목적이다. 의료법은 의료인의 결격 사유, 병원이 갖춰야 할 요건, 의료광고에 관한 촘촘한 규제 조항을 담고 있다. 의료 소비자를 보호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간호법은 간호사의 일·가정 양립지원과 정부 지원 의무까지 규정하고 있어 간호사처우개선법에 가깝다. 전문직 위상 정립을 위한 47년 숙원이라면서 전문직법으로서 기본 모양새도 갖추지 못한 법을 만든 것이다.

흠투성이 간호법이지만 고령화 시대를 맞아 요양과 돌봄 수요 증가에 대비해야 한다는 입법 취지는 귀 기울일 만하다. 급성환자 전문치료만으로도 바쁜 의사들에게 원상회복이 어려운 고령자와 만성질환자 케어까지 책임지라 할 수는 없다. 미국과 유럽에선 간호사나 물리치료사들이 간단한 처방권을 가지고 전문요양원(Skilled Nursing Facility)을 단독 개원해 의사 부족난을 해소하고 의료비 지출 증가를 막고 있다. 환자들로서도 비용 부담이 덜한 선택지가 추가되니 마다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간호사 단독 개원 방안에 대해 의사들은 의료사고 위험을 얘기하지만 간호사의 업무는 이미 돌봄의 영역을 넘어섰다. 무의촌 지역 보건진료소에서는 간호사들이 의사 역할을 대신한다. 의료 현장에는 외국의 PA(Physician Assistant) 역할을 하는 간호사들이 외과처럼 전공의 지원자가 적은 진료 과목의 의사 공백을 메워 주고 있다. “PA 없으면 수술실 마비된다”는 말까지 나오는데 언제까지 간호사 업무 영역을 진료 보조에만 가둬둘 수는 없는 일이다.

2004년에도 간호법이 추진돼 의사단체가 반대하고 간호조무사협회는 ‘간호법 제정 반대 자결 선언’까지 했다. 그로부터 19년이 지났다. 그동안 시대 변화에 맞춰 의료법을 개정하고 간호사를 포함한 보건의료 직역의 업무 영역을 재조정했더라면 지금과 같은 대란은 없었을 것이다. 정부가 10여 개 단체의 이견 조율에 엄두를 못 내고 낡은 법규정을 방치하는 사이 직역 간 다툼만 국민 건강을 위협하는 수준으로 커졌다. 덕 보는 사람은 없고 분란만 키운 빈껍데기 간호법 대신 고령사회의 의료 요양 돌봄 체계를 든든히 받쳐주는 보건의료인력 활용 방안을 마련해 직역 단체들을 설득해야 한다. 의료계의 맏이인 의사들이 직역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양보와 타협의 리더십을 발휘해 주길 기대한다.

#오늘과내일#간호법#간호사#의료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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