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을 8일 남겨둔 6일(현지 시간) 튀르키예 최대 도시 이스탄불에서 만난 대학생 괵첸 카나 씨(20)는 대선 전망을 묻자 “태어나서 처음으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이 아닌 다른 사람이 나라를 이끄는 걸 볼 수 있을 것”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함께 있던 실라 괴네스 씨(19)도 “새로운 튀르키예를 만들 때가 왔다. 생애 첫 투표권을 이런 의미 있는 선거에서 행사할 수 있게 돼 기쁘다”고 했다.》 이스탄불 분위기는 2월 튀르키예 남동부와 시리아 북부를 강타한 대지진 당시 기자가 찾았을 때와는 사뭇 달랐다. 지진 희생자를 추모하는 흰색 리본과 메시지를 띄우던 길가 전광판에는 에르도안 대통령을 비롯한 대선 후보들 광고가 빠르게 지나갔다. 시가지 곳곳에는 정당 홍보용 깃발과 만국기가 어지럽게 걸려 있었다. 이스탄불 명소인 갈라타 다리 앞 광장에서는 각 정당 홍보 차량과 선거운동원들이 시민들 발길을 붙잡았다. 불과 석 달 만에 무기력과 슬픔 대신 대선 열기가 도시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집권 20년, 수세 몰린 에르도안
튀르키예 안팎에서 이번 대선이 어느 때보다 주목받는 이유는 ‘21세기 술탄’으로 불리며 20년 동안 집권 중인 에르도안 대통령(69)이 수세에 몰려 있어서다. 6개 야당 단일 후보 케말 클르츠다로을루 공화인민당(CHP) 대표(75)는 각종 여론조사에서 에르도안 대통령보다 앞서며 정권교체 기대감을 키우고 있다. 여론조사 공표 금지 기간 직전 발표된 한 조사(4월 27일∼5월 5일 조사) 결과에 따르면 클르츠다로을루 후보는 지지율 50.9%로, 에르도안 대통령(43.6%)을 약 7%포인트 앞섰다.
대선 승리로 30년 장기 집권 발판을 만들겠다는 에르도안 대통령과 그의 독주를 저지하겠다는 클르츠다로을루 후보의 승부는 14일 대선 결과가 좌우한다. 1위 후보가 득표율 50%를 넘기지 못할 경우 28일 1, 2위 후보 간 결선투표가 진행된다.
에르도안 대통령을 코너로 몰고 있는 클르츠다로을루 후보는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30년간 금융 관련 정부기관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했다. 공직에서 은퇴한 뒤 정계에 입문한 그는 7년 동안 국회의원을 지내다 2009년 이스탄불 시장 선거에 나섰지만 낙선했다. 2010년부터 제1야당 CHP 대표를 맡고 있다. 클르츠다로을루 후보는 마하트마 간디와 닮은 외모뿐 아니라 2017년 에르도안 정권이 CHP 부대표를 체포하자 이에 항의하며 수도 앙카라에서 이스탄불까지 450km를 걷는 ‘정의를 위한 행진’을 통해 ‘간디 케말’ ‘튀르키예 간디’라는 별명을 얻었다.
클르츠다로을루 후보는 6개 야당 단일 후보로 나서기 전까지 가장 인기 있는 후보는 아니었다. 하지만 단일 후보로 유력하게 거론되던 에크렘 이마모을루 이스탄불 시장과 만수르 야바시 앙카라 시장에게서 공식 지지를 이끌어내는 정치력을 과시하며 지금의 지지율을 얻을 수 있게 됐다.
튀르키예 여론조사 신뢰도는 그다지 높지 않다. 하지만 클르츠다로을루 대표가 대선 후보가 된 후 실시된 50여 차례 여론조사에서 30번가량 에르도안 대통령에 앞선 것을 감안하면 박빙 속 상승세라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영국 BBC방송은 “에르도안 대통령 집권 이후 튀르키예 유권자 양극화가 뚜렷해졌지만 이번 대선만큼 그가 경쟁자로부터 압박을 받은 선거는 없었다”고 분석했다.
‘살인적 물가’ 경제가 최대 이슈
이스탄불 최대 전통시장 ‘이집션 바자’에서 10년째 셔츠 상점을 하는 케말 알리 씨(45)는 “갈수록 적자만 늘어가고 있다”면서 “에르도안에게 질려 버렸다”며 고개를 저었다. 알리 씨는 “지난 대선에서는 에르도안에게 속았지만 이번에는 속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이 수세에 몰린 배경에는 살인적 물가상승률로 대표되는 역대급 경제위기가 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지난달 튀르키예 물가상승률은 43.7%였다. BBC는 “에르도안 대통령이 국제 추세와는 반대로 금리 인상을 거부해 리라화 가치가 폭락하고 있다”며 “공식 물가상승률은 50% 수준이지만 학자들은 실제 물가상승률이 100%를 넘는다고 본다”고 전했다.
20년 장기 집권에 대한 비판과 민주주의 열망 역시 이번 대선 화두로 꼽힌다. 로이터는 처음 투표권을 행사하게 되는 약 600만 유권자 표심이 선거 판도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내다봤다. 대부분 에르도안이 아닌 다른 대통령을 경험해 보지 못한 이들은 변화 열망이 커서 야당 지지 성향을 갖고 있다고 로이터는 분석했다. 7일 이스탄불대 인근에서 만난 제이닙 외즈티 씨(20)는 “에르도안이 집권한 지난 20년간 자유는 억압받았고 젊은 세대를 위한 공약(정책)도 전무하다시피 했다”며 “이번에도 그가 당선된다면 외국으로 취업하러 떠나거나 유학 가는 방안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2월 튀르키예 대지진 여파도 집권 여당에 불리하게 작용한다. BBC는 “5만 명 넘는 목숨을 앗아간 대지진과 그에 따른 경제적 여파가 그렇지 않아도 위태롭던 에르도안 지위를 더욱 취약하게 했다”고 지적했다.
“에르도안, 불복 선언할 수도”
여전히 건재한 에르도안 지지자들은 그의 승리가 필요하다고 힘줘 말하고 있다.
이스탄불 그랜드바자에서 유리 상점을 운영하는 핫산 달라 씨(66)는 “에르도안은 과거 튀르키예 지도자들이 100년 동안 해내지 못한 것을 단 20년 만에 해냈다”며 “이번에도 에르도안이 대통령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달라 씨는 에르도안 대통령이 추진한 각종 사회기반시설 프로젝트 덕에 튀르키예가 과거와는 다른 모습을 갖추게 됐다고 주장했다.
술탄아흐메트 모스크 근처에서 만난 관광객 파티 술탄아흐메트 씨(45)는 “에르도안 대통령 덕에 우크라이나 전쟁 국면에서 튀르키예가 중요한 중재자 역할을 하는 등 국제적 위상이 많이 올라갔다”고 말했다. 이스탄불 시내에서 전구 가게를 하는 제릴 투살 씨(31)는 에르도안 대통령을 겨냥한 대지진 책임론에 대해 “그 정도 지진이라면 지구상 어떤 나라도 미리 알고 대응하기란 어려웠을 것”이라며 “에르도안 대통령이 계속 자리를 지켜야 그가 약속한 지진 피해 지역 복구 계획들이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라고 했다.
박빙 승부가 예상되는 가운데 에르도안 대통령이 패배한다면 선거 결과에 불복할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미국 외교전문매체 포린폴리시는 “에르도안이 선거에서 패배했다고 해서 결과를 우아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2019년 이스탄불과 앙카라 시장 선거 당시 집권당 정의개발당 후보들이 패배했지만 이에 불복해 재투표를 요구하기도 했다.
이스탄불에서 만난 직장인 이스마일 크드므즈 씨(48)는 “튀르키예에도 정권교체라는 새로운 봄바람이 불어올 것이란 희망이 있다”면서도 “군과 경찰을 장악한 에르도안이 이를 순순히 받아들이지만은 않을 것이란 점을 감안하면 정말이지 불안한 희망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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