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는 원래 2시간 30분 정도면 끝나는 경기였다. 우리는 야구가 가장 인기 있었던 시절로 돌아가려는 것이다.”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 사무국에서 ‘피치 클록’ 도입 계획을 발표하자 “‘야구는 시간제한이 없다’는 정체성을 훼손할 것”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이에 대해 롭 맨프레드 MLB 커미셔너는 이렇게 반박했다.
2011년 이전까지 MLB 경기당 평균 시간이 3시간을 넘어간 건 2000년(3시간 1분) 딱 한 번뿐이었다. 그러나 2012년부터 지난해까지는 11년 연속해 3시간을 넘었다. 그리고 맨프레드 커미셔너가 큰소리친 것처럼 피치 클록이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시계가 눈에 보일 때
야구 경기 시간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변수는 ‘투구 수’다. 올해 한국프로야구를 예로 들면 13일 현재 양 팀 투수가 경기당 평균 309개의 공을 던져야 경기가 끝난다. 30년 전인 1993년에는 이보다 31개 적은 278개였다. 경기 시간 역시 올해(3시간 15분)보다 28분 짧은 2시간 47분이었다.
따라서 경기 시간을 줄이는 가장 빠른 방법은 투구 수를 줄이는 것이다. 그런데 투구 수를 줄이려면 투 스트라이크 이후에 파울볼이 나왔을 때도 삼진을 선언하기로 하는 등 규칙을 크게 흔들어야 한다. 그래서 대신 나온 아이디어가 투구 간격에 제한을 두자는 것이다.
MLB는 올 시즌 개막을 앞두고 투수가 포수에게 공을 받은 시간부터 주자가 없을 때는 15초, 주자가 있을 때는 20초를 카운트다운하는 피치 클록을 각 구장 홈플레이트 뒤에 설치했다. MLB에 시간제한 규정이 생긴 건 148년 리그 역사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지난해 MLB 투수들은 주자가 없을 때(18초)나 있을 때(23초)나 모두 이 기준보다 평균 3초 늦게 공을 던졌다.
지난해 MLB 경기당 평균 투구 수는 292개였다. 투구당 3초를 줄이면 경기 시간을 14분 정도 줄일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실제 효과는 두 배였다. 13일 현재 MLB 경기는 지난해(3시간 6분)보다 28분 빠른 평균 2시간 38분 만에 끝나고 있다. 1979년(2시간 35분) 이후 가장 빠른 속도다. 경기가 빨리 끝나면서 일부 구단에서는 맥주 판매량이 줄어 울상을 지을 정도다.
경기가 이렇게 짧아진 건 타자에게도 제약을 두기 때문이다. MLB에서는 타자도 피치 클록이 8초 아래로 떨어지기 전까지 타격 준비를 마쳐야 한다. 한국프로야구는 2010년부터 주자가 없을 때 투수는 12초 안에 공을 던져야 한다는 ‘12초 룰’을 채택하고 있지만 타자에게는 별도 기준 없이 그저 ‘최대한 빨리 타격 준비를 마쳐야 한다’고 주문하고 있을 뿐이다.
2018년 데뷔 후 정규리그 경기에서 한 번도 12초 룰을 위반한 적이 없는 안우진(24·키움)은 “스프링캠프 기간에 애리조나와 합동 훈련을 하면서 라이브 피칭 때 피치 클록에 맞춰 던져본 적이 있다”면서 “한국에서는 내가 던지고 싶어도 타자들이 준비가 안 되어 있을 때가 많았는데 미국 타자들은 이미 준비가 다 된 상태였다”고 전했다.
그런 이유로 한국이 투구 제한 시간이 3초 짧은 데도 평균 경기 시간은 39분이 길다. 2009년부터 ‘15초 룰’을 적용 중인 일본프로야구도 이날 현재 한 경기에 평균 3시간 4분이 걸린다. 시계가 눈에 실제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건 그만큼 차이가 큰 것이다. 한국과 일본은 심판이 초시계로 시간을 잰다.
●한국은 언제 도입할까?
MLB 팬들 반응은 뜨겁다. 59년 동안 로스앤젤레스(LA) 다저스 시즌 티켓을 구매한 스탠 브룩스 씨는 LA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2시간 35분이 걸린) 개막전이 끝나고 집에 왔는데 오후 11시가 넘지 않았더라. 예전에는 언제 이런 적이 있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면서 “내가 야구를 보기 시작한 뒤에 일어난 가장 좋은 변화”라고 말했다.
올 시즌 개막 후 한 달을 기준으로 MLB 평균 관중 수는 2만6753명으로 6%가 늘었다. 유료 온라인 방송 MLB.TV 누적 합계 시청 시간도 12%가 늘었다. 조 마르티네즈 MLB 부사장은 “경기 시간은 20%가 줄었는데 시청 시간은 12%가 늘어난 건 그만큼 많은 사람이 본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선수들도 피치 클록에 적응하고 있다. 오타니 쇼헤이(29·LA 에인절스)는 지난해 공을 하나 던지는 데 평균 21.7초가 걸리던 투수였다. 7개나 되는 구종을 던지다 보니 포수와 사인을 주고받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게 제일 큰 문제였다. 이번 시즌에는 ‘피치컴’이라는 전자 장비로 사인을 주고받으면서 평균 투구 간격(15.3초)을 6초 이상 줄였다.
포수와 외야수를 겸하는 M J 멜렌데즈(25·캔자스시티)는 “예전에는 외야 수비를 볼 때 좀 심심하기도 했다. 이제는 항상 경기에 참여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면서 “사실 마이너리그에서 처음 피치 클록을 접했을 때는 정말 싫었다. 그런데 그 경험 덕에 MLB에서도 빨리 적응한 것 같다”고 말했다. 마이너리그는 지난해부터 피치 클록을 전면 도입한 상태다.
피치 클록은 국제대회에서도 ‘뉴 노멀’이 될 수 있다. 유병석 한국야구위원회(KBO) 국제파트장은 “MLB에서 2020년부터 도입한 ‘세 타자 규칙’(마운드에 오른 투수는 최소 세 타자를 상대해야 한다)이 올해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때부터 적용된 걸 보면 2026 WBC 때는 피치 클록도 적용될 가능성이 높다”면서 “국제 대회 도입 여부와 별개로 KBO 역시 피치 클록의 영향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고 전했다.
●“시간을 조금 더 달라”
물론 ‘피치 클록 반대파’도 여전히 있다. 이들이 제일 큰 근거로 삼는 건 부상 우려다. 앞으로 기온이 더욱 올라갈 텐데 이런 상황에서 공을 빨리빨리 던지다 보면 몸에 부하가 크게 걸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이너리그에서는 피치 클록 도입 이후 부상이 11% 줄었다는 연구 결과도 있어 아직 결론을 내리기엔 이른 상황이다.
피치 클록이 ‘야구는 타이밍 싸움’이라는 명제를 부정한다는 의견도 있다. 안우진은 “투수는 투구 템포를 바꾸면서 던져야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똑같은 타이밍에만 공을 던지면 배팅볼 기계와 다를 게 없지 않나”라면서 “피치 클록에 맞춰 던져 보면 숨이 차서 원하는 곳에 공을 던지기가 어렵더라. 지금보다는 제한 시간을 좀 더 늘려줘야 한다”고 말했다. MLB 최고령 투수 리치 힐(43·피츠버그)도 “투수는 물론이고 주자를 위해서라도 5초 정도의 여유가 더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냈다. 이들 역시 ‘여유’가 조금 더 필요할 뿐 시간제한이라는 취지 자체에는 반대하지 않는 것이다.
일본 고교야구를 다룬 만화 ‘H2’에는 “시간제한이 없는 경기의 묘미를 알려드리겠다”는 대사가 나온다. 이 만화가 처음 나온 1992년 일본 고교야구는 연장 18회까지 승부를 벌인 뒤 무승부가 나오면 재경기에 재재경기까지 치렀다. 이제는 승부치기로 바뀐 지 오래다. 야구팬들도 “시간제한이 ‘있는’ 야구의 묘미”에 익숙해질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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